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가 나른한 꿈처럼 펼쳐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올리브가 익는 곳에서의 휴가를 닮은, 미혹으로 가득 찼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 하지만 여름의 끝을 알리는 폭우마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창고 깊숙이 넣어두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쓸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죽는 것과 사는 것, 무언가를 쌓기 위해 시간을 견디고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키는 것과 축적한 것들을 두고 훌쩍 떠나는 것. 타인의 인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함부로 말할 자격을 지닌 사람은 누굴까?
흔히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종이 동물원」을 읽으며 어쩌면 켄 리우는 표현하는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에 가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알맞은 때에,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의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이토록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눈앞에 직접 닥쳤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수많은 다른 선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쉽게 금을 긋고 선과 악, 옳고 그름 중 하나를 택하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멀찍이 떨어진 강의 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끊임없이 살아내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은 결코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럴듯한 거짓말쟁이일 뿐일 것이다. 어떤 프랑스 철학자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 속의 한 구절처럼. 이런 말이 있다(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978. 3. 20.)* *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애도 일기』, 걷는나무, 2018, 111쪽.
어린 시절 나를 무섭게 만드는 것은 비현실의 세계였다. 귀신이나 지옥처럼, 누구도 명료하게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명료한 것들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칼로 벤 자국처럼 선명한 말이나 확신에 찬 주장 같은 것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상한 신념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인생을 실패나 성공으로 요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좋은 문학 작품은 언제나,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나 성공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세상은 불확실한 일들로 가득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당신과 나는 반드시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고 고독과 외로움 앞에 수없이 굴복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렇더라도. 당신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뿐이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는 가랑눈이 흩날렸다. 눈이 내리는 낯선 도시를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편지를 썼다. 네모난 유리창은 누군가 하얗게 가루를 날리며 썼던 글을 지우는 편지지였다. 그건 부치지 못할 연서였다. 아침이 밝으면 지우게 될 줄 알면서도 생生의 밤마다 쓰고 또 쓰는 연서. 그 시절, 내 안에는 발신하고 싶은 편지들이 너무 많았지만 수취인은 언제나 소재 불명이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누구나 저마다 누려야 할 몫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좌절, 자유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존중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디어 라이프』를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나의 내밀한 고백에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읊조려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과 내가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들인 한 인생은 아직 친애할 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평화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슬픔을 자아내는 망자의 얼굴을 본 로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늦게 돌아오는 로라를 마중 나온 오빠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끔찍했니?” 하고 동생에게 묻는다. “아니.” 로라가 흐느꼈다. “그저 경이로웠어. 그렇지만, 오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이란 게,”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인생이란 게—” 그렇지만 인생이 어떻다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는 무슨 소린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응?” 로리가 말했다.* * 『가든파티』, 235쪽.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 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멀리, 멀리 와버렸지만 가끔 바람이 몹시 부는 밤이면, 가로등 켜진 골목길 위에 서 있는 나를 다시 마주할 때가 있다. 피부가 투명하리만치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깥의 아주 작은 자극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움츠러들던 나를.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져 행복할 때마다 도리어 무서워지곤 하던 날들의 나를. 그럴 때면 나는 그때의 그 아이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고 싶어지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를 충만히 사랑해야만 해. 그러면 스물두 살의 그 아이는 틀림없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걱정 마, 나도 이제 막, 그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중이니까.
이성은 중요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는 세계를,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