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5
하지만 빛이 난다고 세상의 모든 피아노가 저마다 음이 다르다는 사실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반면 대다수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자기들이 듣는 음이 전부 표준적이고 완 벽하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힘이다. 솔직히 말해, 인간도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또 다 른 물건에 불과하다. 우리도 똑같이 영혼이나 신성함, 사 랑, 아름다움 등 추상적인 말로 포장되지 않는가? 문명은 늘 우리한테 사물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면 된 다고, 절대 의심하지 말라고 주입하지 않는가?
p52
어쨌든 에밀리보다 스무 살이나 많으니 잘 모르면 또 어떠냐고 생각했다. 오랜 사회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반 드시 알아야만 안심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란 없었다. 인 생은 싸우면서 물러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린쌍이 성장할 때만 해도 음악을 전공했다는 말은 모종의 가정 교육이 보장되었다는 뜻이었고, 미국에서 예술 학위까지 받은 에밀리는 그가 기존 생활권에서 만날 수 있는 이성 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훨씬 단순했다.
p59
말을 마친 뒤 린쌍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대화를 통해 나는 린쌍이 고지식한 사람이 아님 을 발견할 수 있었다. 때로는 린쌍이 술주정하는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린쌍이 말하는 당시는 지금의 내 나이 인 듯했다. 이제 린쌍은 모임에서 가장 어린 막내 역할을 할 수 없 었다. 마음으로만 따지면 린쌍이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 다 더 늙었을지도 몰랐다. 원래 일정한 나이가 지난 뒤에는 지혜가 실제 나이에 맞춰 성장하지 않아. 모두 똑같이 노인이라 적힌 패를 받 을 뿐, 예순 살이나 여든 살이나 차이가 없지. 나는 한참 동안 린쌍의 탄식을 듣고 있었다.
p60
린쌍이 앉아 대작하는데 뜻밖에도 잘 형은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의장이라 불리며 큰 소리로 떠들던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불현듯 린쌍은 그 나이 많은 형들도 진심 으로 상대를 대했던 게 아님을 깨달았다. 린쌍이 합류한 이후에야 난로에 불씨가 생긴 것처럼 그들 사이에서 공허 하고 과장된 흥이 일었던 거였다. 후배라는 청중이 생긴 뒤에야 그들은 한층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사람은 나이 가 들수록 체면을 따지고 정말 외로움이 밀려들 때는 혼 자 숨는 것밖에 못 하는 존재였다.
p69 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내게 훌륭한 장비가 있다는 것만 알았어. 누 구도 음악이 피아노가 아니라 내 그림자 속에 있다는 건 말해 주지 않았지. 모든 사람이 공명의 방정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알 려 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어떤 사람은 악기에서 찾고 어 떤 사람은 노래에서 찾아. 더 운이 좋은 사람은 망망한 세 상 속에서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명을 깨우는 모종 의 진동을 찾아낼 수 있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일 수도 있어. 신뢰라는 이름일 수도 있고. 우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기보다 흘러간 과거를 듣는다고 하는 게 맞아. 각각의 건반이 토해 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일 뿐이니까.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지. 가장 고독한 사람도, 가장 가난한 사람도, 심지어 죽어 가는 사람까지 누구나 드뷔시나 바흐의 곡에서 똑같이 감 동할 수 있어. 그게 우리가 온 곳이자 갈 곳이거든. 피아니 스트가 말했다. 그렇다. 나는 그날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p132
자기 귀를 만족시키려면 해머를 만신창이로 만들 수밖 에 없음을 알아도 피아노 주인들은 계속 고집할까? 성형 수술로 소위 완벽한 연인을 만든다면 그런 완벽함에서 여 전히 개성을 찾아볼 수 있을까? 연주가가 주관적으로 추구하는 음색은 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진동이 아니라 단지 어딘가에서 들어 본 기억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또 그런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 어긋나거나 비틀려 모종의 환상으로 변하지 않았을 까? 세상과 동떨어진 원시 마을을 찾아 그곳 사람들에게 생전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면 그들 마음속에 는 어떤 욕망과 상상이 소환될까? 그들은 자기가 들은 소리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까?
p133
어쩌면 이것도 연주가나 피아노 교사보다 조율사가 내 게 더 적합하다고 여기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음색에 대 한 연주자의 집착과 완벽주의에 대해 나는 영원히 나와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율 일은 나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최소한의 접 점이다. 원래는 누군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대상이 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공범이 되는 것과 신뢰를 받는 것은 절대 같은 일이 아니었다.
p165
너는 네 집이 대체 어디라고 생각하니? 나는 말문이 막혔어. 그 순간 나는 내가 심오한 고 전 음악을 위해 매진하던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걸 알 았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으면 서 꿈을 좇아 그곳에 온 온갖 유형의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나는 인생이란 흑 아니면 백이라는 양자택일이 아님을 차츰 깨닫게 되었어. 소위 꿈이란 타고난 능력 과 기회와 인맥에 좌지우지될 때가 많다는 것도. 진정한 꿈은 네가 가장 막막하고 방황할 때 너를 다시 끌어 주는 힘이란다. 조지프가 세상을 떠난 뒤 그 런 생각이 한층 강해졌어.
p166
그날 선생님이 적합한 사람을 못 만났느냐고 물었 던 거,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 사생활을 캐물은 게 아 니라 네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잖아. 어떤 일은 제삼 자가 더 잘 보는 법이고. 너 감정적으로 무슨 문제 있 지? 그날 좀 넋이 나간 듯 보였어. 당시 선생님은 두려 운 게 없었거든. 너도 좀 대범해지렴. 인생이란 원래 왔 다 갔다 하는 법이니 두려워하지 마. 너는 꿈을 가진 사 람이잖아. 그건 틀림없이 필요할 때 나타나서 너만의 주선율을 되찾아 줄 거야.
p175
인생에는 방해물이 너무 많고 세상사는 번잡해요.' 나는 나 자신이 싫어요. 그게 다예요. 「에니그마」는 대가의 그런 몇 마디 말로 끝나서 좀 허 탈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당신은 영영 늙지 않을 테니 늙어 가는 게 얼마 나 외로운지 몰라도 돼요. 애당초 나는 위대한 조율사가 될 수 없는지도 몰라요. 내가 대가와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점이라고 는 나도 나 자신이 싫다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그것뿐이 지요.
p188
반면 무대에서는 어떤 연주가든 똑바로 앉아 극도로 집중한 채 모든 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장악하려고 하 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공연의 그 순간은 운명이 가장 통제되지 않는 순간이기도 해요. 운명은 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용히 경로를 바꾸잖아요. 어떤 사람은 한순간에 성공하고 어 떤 사람은 갈수록 고꾸라지지요. 하지만 대체 몇 번째 소 절에서 돌연 운명의 신이 곁눈질을 보낸 걸까요? 나중에 알아 봐야 그런 건 퍼즐에서 부주의하게 떨어진 조각들에 불과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