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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A Short Film about Killing)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A Short Film about Killing

택시 기사 레콥스키는 물 양동이를 들고 걷다가 지나던 건물 위에서 떨어지는 옷가지에 맞을 뻔한다. 레콥스키는 그 건물에 사는 사람에게 그 옷가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고, 고의로 자신을 맞힐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나온 20살의 야첵은 거리의 광고판을 장식하고 있는 소녀의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극장 안에 들어선다. 흰 머리를 뽑고 있던 매표구 여직원은 야첵에게 상영중인 영화는 따분한 멜러 영화라고 말하고, 야첵은 그녀에게 택시 정류장이 어디인지 묻는다. 변호사 연수를 끝낸 표트르는 변호사 시험장에서 초조하게 구두시험의 차례를 기다린다.

레콥스키는 자신의 택시를 청소한다. 야첵은 택시 정류장이 있는 성광장으로 가다가 한 소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초상화가를 만난다. 구두시험장에 들어선 표트르는 왜 재판변호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공익적이고, 유용한 일이며 다른 직업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한다. 광장으로 가던 중 야첵은 도망치는 한 남자를 붙잡는 두명의 남자를 보게된다. 택시정류장에 도달한 야첵은 많은 사람들이 줄 서있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한 여인은 야첵이 비둘기들을 겁준다며 비켜달라고 한다. 택시를 청소중이던 레콥스키에게 택시를 타려고 하는 한 커플이 청소가 끝날때까지 근처 건물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구두시험중인 표트르는 형벌에 대한 자기의견을 시험관들에게 피력한다. 형벌은 범죄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형벌은 모방을 금지시키는 것이며 위협에 의한 저지라고 말한다. 청소를 끝낸 레콥스키는 근처 식당에서 일하는 베타에게 드라이브를 청하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던 커플을 태우지 않고 그냥 택시를 출발시킨다. 야첵은 소녀들의 영성체 기념사진이 걸려있는 사진관에 들어가 여동생 마리샤의 구겨진 영성체 사진을 확대해달라고 한다.
표트르는 구두시험에 통과하고 변호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고 기뻐한다. 야첵은 길 건너의 군인들과 택시 정류장의 사람들이 택시에 타는 모습들을 번갈아 유심히 본다. 표트르는 아내와 만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기쁨을 함께 나눈다. 레콥스키는 한 남자가 화려하게 치장한 두 마리의 강아지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경적을 울려 강아지를 놀라게 하고, 술취한 사람에게 승차거부를 한다. 야첵은 표트르와 그의 아내가 앉아있는 식당에 들어서서 케익과 커피를 마시면서 밧줄을 한 손에 탄탄하게 감기 시작한다.

야첵은 레콥스키의 택시에 타고 모토코프로 가자고 한다. 야첵은 가는 도중의 으슥한 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말을 하고 준비된 밧줄로 레콥스키의 목을 조른다. 야첵은 레콥스키의 목을 의자 등받이에 묶고 얼굴을 곤봉으로 친 후 레콥스키의 시체를 버리려고 강가로 끌고간다. 죽은 줄 알았던 레콥스키가 신음소리를 내자 야첵은 레콥스키의 얼굴을 돌로 친다. 레콥스키의 시체를 버린 후 야첵은 레콥스키의 택시에서 레콥스키의 소지품을 다 버린다. 차창에 매달려있는 괴이한 인형머리 하나를 남기고. 그리고 야첵은 베타에게 가서 차가 생겼다고 자랑한다. 베타는 이 차가 레콥스키의 택시임을 알아본다.

야첵의 살인혐의에 대한 재판이 끝난다. 변호를 맡은 표트르는 실의에 빠지고 판사와의 면담을 요청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변호를 맡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에 대해서 묻는다. 표트르는 자신과 야첵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말하고 범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한다. 사형집행인은 손수 밧줄과 기타 사형도구를 점검하고 형 집행 직전에 표트르는 야첵과 대화를 나눈다. 야첵은 여동생 마리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버지와 마리샤 옆에 묻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진관에서 확대를 부탁한 마리샤의 사진을 어머니에게 갖다달라고 말한다. 야첵은 간수들에게 겹겹이 둘러쌓여 형장으로 끌려간다. 형장에서 신부가 야첵에게 최후의 축복을 내리고 소장은 판결문을 낭독하고 야첵은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 야첵은 마지막으로 죽음을 거부하다가 교수형을 당한다. 형이 끝난 후 표트르는 들판에 차를 세워두고 오열한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89년 폴란드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으로 만든 십부작 「십계」는 불안과 혼란을 내포하고 있는 현대의 폴란드에 대한 열개의 계명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완성된 다섯번째 작품 「살인하지 마라」에 30분을 추가하여 다시 극장판으로 만들어진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여섯번째 이야기 「간음하지 마라」를 같은 방법으로 옮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하나의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곧 스물 한 살이 되는 야첵이 명백한 동기 없이 택시 기사 레콥스키를 살인하는 것과 공권력에 의해 야첵이 그 살인의 대가로 사형되는 두 가지의 살인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다큐멘터리 작업 때부터 스스로 발전시켜왔던 영화적 구조 안에서 독자적 인과율을 가지고 진행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야첵과 표트르와 레콥스키의 동선과 시선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적 방법론 안에 영화 전체를 녹색 필터로 다시 한번 걸러낸다. 다큐멘터리의 스타일로 끌어내어지는 카메라는 영화의 시선을 객관화시키지만 녹색 필터는 이 영화의 사회에 대한 시선에 주관적 비정함을 부여한다.

서로 무관한 동기로 전혀 다른 곳에 서있는 야첵, 레콥스키, 표트르는 그들의 삶이 하루 동안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그들 각자의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청년 야첵의 목적 없는 방황은 여동생 마리샤의 죽음에 대한 자책으로 시작되어 내부적 불안과 자괴로부터 길거리의 외부적 상황으로 내몰린 후 스스로 내부적인 목표를 세운다. 그 목표가 파괴적인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외부와 의사소통하는 길로 들어서면서 얻게 되는 그의 귀속감은 사형제도에 의해 다시 빼앗긴다. 택시 기사 레콥스키는 야첵의 시선에 잡힌 대부분의 인물들과는 달리 매우 이기적인 까닭에 야첵의 소외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죽음을 유도하는 결과를 맞는다. 그가 귀찮은 손님에게 승차거부하지 않고, 먼 목적지를 가려는 손님 중 단 한명만이라도 따돌리지 않았다면 야첵을 태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어길 수 없는 인과율처럼 어김없이 맞이해야 한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가 ‘살인하지마라’라는 경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 경고를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과율 속에 묶는다는 사실이다. 이 엄격한 구약의 여호와는 야첵의 시선과 내재적 불안을 모든 이의 것으로 규정한 만큼 야첵의 살인 과정에서 내보여지는 일말의 주저와 자기회의적 태도를 사형집행장의 발작으로 이끌어낸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영화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지켜보면서 속수무책의 작가적 시선으로 시종일관 야첵의 살인 행위에 대해 어떠한 면죄부도 씌우지 않는다. 야첵은 사형집행장에서 신부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나 (사람이며 직업적으로 신의 대행인인) 신부는 야첵의 손을 뿌리친다. 그래서 야첵에게 이미 구원은 없다.
표트르는 형벌의 가치를 믿지 않는 이상주의적 변호사이며, 그는 한편으로 형벌이 카인의 형제 살인 이래 그 어떤 범죄도 근절하지 못했다고 외치면서 역설적으로 규율과 법의 내부적 보호망에 안주하기를 바라고 있다. 표트르는 형벌이 범죄행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는 의견을 변호사 구두시험에서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야첵의 사형을 반대하는 표트르의 최후의 변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론적이며 법의 근본적인 성립 이유를 설명하는 표트르의 의견은 야첵의 살인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키에슬로프스키의 프레임은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바르샤바의 군상들의 일상을 담아간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적 카메라 안에는 그 어떤 인물이나 상황도 모두 예정된 운명 안에 놓여있다. 모든 인물들은 프레임 안에서 비껴간 시선과 타인의 원인 모를 행위에 상처를 받고 있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는 운명으로 짜여진 길을 따라가며 ‘살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7분에 이르는 야첵의 살인 장면과 5분에 이르는 법에 의한 사형집행이 갖는 무게는 대등하게 작용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야첵의 살인행위에 대한 그 시선의 냉정함을 그대로 공권력이 제도적으로 집행하는 사형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키에슬로프스키가 살인과 사형 그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정말 다루려고 하는 것은 세상 속의 신의 주사위이다. 이 주사위의 운명은 언제나 우연 속의 필연이며, 동시에 그 역도 성립한다. 그래서 야첵과 레콥스키, 표트르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우연히 선택되었지만, 필연적인 결과를 맞는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어려운 것은 우연과 필연 사이의 고리에 대한 해석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가지고 있는 다층성은 영화 전체를 관통시키며 일관된 태도 안에서 거리를 지켜내고 있는 녹색 필터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또한 (노출의 스톱 차이를 강화시켜 암부를 주변부에 위치시키거나 환형의 프레임을 덧씌움으로써) 프레임의 가장자리 부분을 지워가면서 영화 바깥에서 이 영화의 내부로 던져지는 시선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성영화 시대 이후 오랫동안 영화에서 사라진 방법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프레임 내부에 다시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무성영화 이후 오랫동안 잊어왔던 침묵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물론 그 침묵은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계명을 관철시키는 신의 침묵일 것이며, 침묵 속에서 우리가 세상 속의 우리 이웃에게 주의를 돌리고 시선을 맞추어 다시 대화하기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정말로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미학적 효과가 아니라 도덕적 계율 때문에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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