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회고전
크쥐쉬토프키에슬롭스키를 회고하며
'영화는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SLOWSKI)가 태어난 곳은 폴란드 바르샤바로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이었다. 어린시절은 가난과 가정불화로 결코 행복하지 못했고, 그는 신부가 되고싶어 했다. 1살때 소방학교에 입학하지만 관료적인 규율 체제에 대해 혐오감만을 가지게 되고 결국 방향을 바꿔 64년 폴란드 최고의 영화학교인 로츠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기록영화를 전공 했으며, 당연히 기록영화 부문의 선구자들인 지가베르토프, 로버트 플래허티를 존경했고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도 좋아했다. 보통 동유럽의 기록 영화는 다른 유럽, 미주 그리고 소련과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것의 역사적 배경은 동유럽에서는 하층으로부터가 아닌 상층, 그것도 외부세력인 소련의 영향력 아래 사회주의가 진행된 사실이다. 이것은 혁명이 민중의 의사에 입각한 것이라기 보다 소수의 혁명적 공산당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곧 사회의 관료성과 비민주성을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동유럽의 기록영화들이 인간과 사회주의의 문제를 다룰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화두는 왜 인간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에서도 인간은 그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는가였다.
이런 동유럽 기록영화의 전통이 배어있는 영화학교를 68년에 졸업하고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듬해 <The Photograph라는 TV 기록영화로 공식 데뷔한다. 이후 잠시 그는 WFD라는 기록 영화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74년에는 토르(Tor)영화사 재작부에 참여해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10년 뒤인 84년에는 대표가 되었다.
보통 키에슬롭스키의 작업방식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록영화를 찍을 때부터 그만의 작업방식을 고수했으며 이는 이후 극 영화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구상을 단 한 장의 종이에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차츰 자신의 구상에 살을 붙여 이것을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늘린다. 다음에는 시나리오 작가와 협의하여 두 배에서 세 배까지 그 분량을 늘린다. 다음은 촬영 감독과 협의하에 이를 100장 정도로 다시 확대하고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를 불러 함께 검토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대사인데 배ㅜ로 하여금 직접 읽게 하면서 그들은 악센트나 발은, 음색, 목소리의 톤등을 감안하여 써나가는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 자신은 감독이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월 13일은 한국에도 '삼색(三色) 3부작'로 널리 알려진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가
사망한지 1주기였다. 기록영화로 출발하여, 극 영화에서 놀라운 '이미지' 창조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었던 이 폴란드 감독은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는데, [로드쇼]는 그의 사망 1주기를 맞아 회고의 자리를 마련해 보았다.
피시에비츠와 만남
데뷔부터 84년까지 키에슬로프스키에게는 사실 거칠 것이 없었다. 만하임 영화제(75년), 크라크우영화제(74, 75, 77, 79년), 그다니스크 영화제(75, 76, 79년), 모스크바 영화제(79년), 베를린 영화제(80년), 시카코 영화제(80년)등에서 수상하며 자신의 명성을 동유럽뿐 아니라 서구까지 떨쳤다. 이 당시 그가 만든 영화들은 거의가 기록 영화들이었고 극영화는 TV용으로 만든 75년작 <Personnel이, 극장용은 76년작 <The Scar가 처음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 활동 초기라 볼 수 있는 이시기에 가장 유명한 작품은 '우연한 만남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마추어(79년)<Blind Chance (82년) <No End (84년)들이다. 이때부터 그의 연작에 대한 관심이 범상치 않은 것이었으며, 키에슬로프스키는 후에 이 작품들은 모두 자기 스타일을 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기록영화와 극영화가 반반씩 썩인 형식을 실험 하였으며,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이 당시의 폴란드 국내 정치 상황은 바웬사가 지도하는 여내 노조 운동이 점점 고조되는 시기 였으며, 이에 따라 사회 정세는 무척 긴장되어 있었다. 이 때 키에슬로프스키는 변호사인 크쥐쉬토프 피시에비츠와 만나는데 이는 그의 생애에서 상당히 주목해야 될 부분이다. 피시에비츠는 45년 바르샤바 출생으로 바르샤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법정에서 3년간 근무 했으며, 게엄법이 공포된 후에는 연대노조를 옹호하기 위해 각종 판레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키에슬로프스키는 게엄법하의 정치적 재판들을 기록영화로 담으려 했고 피시에비츠에게 그의 직접적인 경험을 영화적 토대로 삼기위해 자문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둘이 만난 것이 1982년 이었고 키에슬로프스키 작품인 <Blind Chance는 이런 연유로 대중들에게 87년까지 공개되지 못하고 사장도어 버렸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피시에비츠와 손잡고 공동 각본을 쓰게되며 이 결과물이 84년작 <No End다.
둘은 이미 10년 전부터 키에슬로프스키 머리속에 구상되 온 <십계 The Decalogue연작에 착수하고 이 공동 작업은 키에슬로프스키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십계> Dekalog
원래 이 시리즈의 구상은 기본적으로 키에슬롭스키의 것이었다. 그는 '우연한 만남 3부작'을 시작할때부터 이에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피시에비츠의 제안으로 본격적인 작업에 뛰어 들었다. 둘은 처음에 '십계명'이 가지는 종교적인 비중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했다.
키에슬롭스키는 이 연작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 대해 항상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들 당시 포란드의 상황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 긴장감과 불안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이에 지친 나머지 될대로 되라는 식의 허탈감을 많이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연작은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극 갈등 구조의 중심에 놓고 이 틀에서 윤리적인 결단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풀어 나간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를 통해 사람들이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고 한 번더 생각해 보기를 기대 했던 것이다.
<십계 연작에서 연출과 각본, 음악(즈비그뉴 프라이즈)을 제외 하고는 매 작품마다 팀이 모두 바뀌었다. 전체적으로도 드라마 형식이 열 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만 기록영화(5편), 심리학적 실내극(4편), 멜로물(9편), 코미디(10편)등으로 형식적인 외양도 다양하다.
<십계?는 모두 87년 3월부터 88년 4월 사이, 단 2년 2개월 사이에 모두 만들어 졌으며 각각의 런닝 타임은 60분 안이다. <십계의 5편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6편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으로 이 시리즈와 독립적으로 만들어 졌다.
1. 하나이신 하나님을 숭배하라
1편의 중심인물은 파웰이라는 어린 아이다. 그는 과학자인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인 고모 사이에서 죽음에 대해 물어 보지만 그들의 대답은 신자와 과학자로서각각 자기 처지에 따른 것이다. 또한 파웰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대해 고모는 인간의 감정을 담을수 없다고 하고 아버지는 컴퓨터가 주관적 가치 판단도 하리라 맏는 사람이다. 파웰은 집 주변 연못의 두께가 얼마인지를 아버지와 함께 컴퓨터로 계산한다. 컴퓨터가 내린 결론은 파웰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거다. 아버지는 스케이트를 타려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도 하지만, 다음날 아들은 죽고 만다.
2.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부부가 있다. 남편은 암으로 희생 여부가 불투명하고, 아내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회생 여부를 궁금해 하는데 그 여부에 따라 아이를 낙태할지 말지를 결정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는 살아날 가능성은 적지만 확신은 할 수 없다고 대답을 회피한다.결국 아내는 도덕적인 책임 때문에 낙태를 결심하고 의사에게 통보한다. 그 역시 남편이 죽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편은 죽지않고 살아나며 아내와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의사를 찾아와 말한다.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성탄 전야, 야누즈라는 남자는 자기 가족들을 위해 성탄 전야를 즐겁게 보내려 한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자신의 옛 애인인 에와가 찾아와 자기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하며 같이 찾아 줄 것을 무탁한다. 야누즈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와 한밤의 바르샤바 시내를 돌아 다니기 시작한다. 병원과 광장을 거쳐 에와의 집으로 간 그들, 거기서 야누즈는 의혹을 느끼지만 에와와 다시한번 사랑에 빠지려 한다. 그러나 우연히 성가를 부르는 아이들이 찾아와 이들의 산통을 깨트리고 그들은 다시 에와의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결국 마지막에 도착한 기차역에서 에와의 행동은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단지 야누즈 있다면 다시 뭔가가 잘 될거라 믿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간 야누즈는 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다시는 밤을 나가서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호히 말한다.
4. 부모에게 효도하라
잉카는 여대생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현재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편지로 조작하여 아버지인 미할에게 보인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딸은 그 날 밤 서로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한다. 딸은 아버지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 이튿날 아버지가 떠나려는 줄 알고 잉카는 편지는 자신이 조작한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는 진짜 편지를 꺼내 태운다.
5. 살인하지 말라
야첵은 스무살의 젊은이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가진 노끈으로 택시 운전기사의 목을 조른다. 텍시 기사는 가까스로 빠져 나가지만, 뒤 쫒아간 야첵은 그를 벽돌로 때려 죽인다. 표토르는 야첵의 변호사로 둘은 매우 가까워 진다. 판사 역시 표토르의 변론을 노피 평가 하지만 야첵은 사형을 면치 못한다. 형 집행을 앞두고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표토르는 야첵의 살인 행위에 배경이 되는 그의 개인사를 알게 된다. 이 계명을 토대로 한 극장판 <살잉에 관한 짧은 필름과 다른점은 '변호사'의 관찰자적 시각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6. 간음하지 말라
열 아홉살 고아인 토멕은 밤마다 건너편에 사는 연상의 여인 막다를 매일밤 지켜본다. 처음에는 관음증과 호기심이 결합되어 있던 행위가 어느 새 사랑으로 발전해 간다. 그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직접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근무하는 우체국에 올 수 있도록 가짜 우편물 수령증을 보내기도 한다. 막다가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될 때쯤 토멕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둘은 그날밤 만난다. 막다는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고 이에 실망한 토멕은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그녀의 집을 뛰쳐 나간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살을 기도한다. 막다는 진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토멕을 만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7. 도둑질 하지 말라
3대에 걸친 여자 셍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에와는 자기 딸인 마이키가 낳은 아이 안나를 자신의 딸로 키우고 있다. 벌써 다섯 살, 마이카는 이제 더 못참겠다고 소리지른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자고 한다. 물론 안나의 '법적인 어머니'이자 '사실상 어머니'인 에와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에와와 마이카는 안나를 사이에 두고 기차역에서 오고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기차가 들어오고 마이카는 차에 올라 탄다. 에와는 안나를 끌어 안는데, 이 순간 안나는 에와의 품에서 빠져나와 얼마 동안 기차를 따라 가다 멈춘다.
8. 거짓말 하지 말라
60살의 윤리학 교수인 조피아는 '윤리적 지옥'이라는 이름의 세미나를 맡고 있다. 여기에는 뉴욕에서 온 엘비즈에다 로란쯔라는 여자도 참여 한다. 맨 처음 이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십계 2편의 내용이다. 조피아는 어쨌던 여기서 아이가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아기 한다. 엘즈비에다는 2차 대전 당시 나찌를 피해 유태인 소녀가 폴란드인의 집에 숨으려 한 사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당신 안내인은 이런 사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행위라 하여 중간에 거절한다. 그 부인이 바로 조피아, 숨으려던 소녀는 엘비즈에다였다. 둘은 서로를 알아 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소피아는 당시 엘즈비에다를 숨겨 주려 한 집이 독일 비밀 경찰과 관련이 있었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이 정보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고 그 가족은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조피아의 집에서 하룻 밤 묵은 엘즈비에다는 그 폴란드인을 찾아간다. 재단사인 그는 전쟁에도, 평화도, 현재에 대해서도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일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 필요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는다.
9.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로만은 성공한 외과 의사이며 예쁜 아내도 있다. 어느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그는 자신이 성불능임을 알고, 아내 항카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 한다. 이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로만은 아내 주위에 딴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로만은 자기 집에서 그 남자와 아내의 정사 장면을 지켜 보게 된다. 항카는 여행을 떠나고 로만은 입양을 추진한다. 그러나 아내와 정사를 나눈 남자 역시 그녀와 동일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불신은 다시 살아난다. 로만은 이제 아내에게 자신의 자살을 알리는 편지를 남기고, 아내는 스키장에서 그 남자를 보고 남편의 의심이 미치리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펴지를 본 항카는 울고 마는데, 그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어머, 당신이군요…"전화를 받은 항카의 대답이다.
10. 남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
<십계 연작 중 유일한 코메디. 예르지와 아르투라 형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거액의 우표 수집품을 상속하고 이를 완전한 수집품으로 만들어서 값을 더 올리려 한다. 이들은 자기에게 없는 여분의 우표를 얻기 위해 형인 예르지가 우표상의 딸에게 콩팥을 기증하기로 한다. 그들의 수술과 기증은 석공적으로 끝나지만 자신들이 갖고 있던 우표 수집본은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뒤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사실 이<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란 제목은 적절치 못하다. 원제엣 보이듯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베로니끄이며, '이중생활'이라는 의미도 영화의 흐름상 '두 가지 삶' 정도로 바구어 주는 것이 원래 갑독의 의도나 영화 흐름상으로도 타당하며, 이런 제목에 대한 전제가 이 작품의 느낌과 내용을 올바로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주연을 맞은 이렌느 야곱은 앤디 멕도웰 대신에 캐스팅 되넜으며, 영화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녀가 아니라 엘즈비에타 토바르니카라는 소프라노이다.
영화의 첫 부분,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별에대해, 베로니끄의 어머니는 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이 부분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은 컬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첮 부분은 영화 속 주인공의 이중적 삶에 대한 기본적인 모티브를 제공하며 영화의 마무리에 대한, '순혼과 생명력' 이라는 해답의 열쇠 이기도 하다.
눈부시게 노래를 부르는 베로니카, 그녀 에게는 안텍이란 애인이 있지만 어느 날 크라코우에 있는 숙모 집으로 가야 겠다고 결심한다. 이곳에서 베로니카는 우연히 합창단 오디션 기회를 잡게 되고 시험을 통과한다. 베로니카에게 가장 이상한 경험은 시위 현장에서 자신과 그야말로 도장찍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한 여인을 우연히 목격한 사실이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하던 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여기서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눈 후의 모습ㅇㄴ 베로니끄에게 옮겨 진다. 이 부분은 베로니카가 자기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눈 후의 장면과 똑같은 자세, 구도를 갖고 있다. 베로니끄에게 남자 친구는 누군가를 잃었느냐고 묻고 그녀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다. 베로니끄 역시 음악 학도 였으나 곧바로 이를 포기 한다고 자기 선생에게 말한다.
어느날 인형극을 보러 간 베로니끄는 인형을 조종하는 알렉산더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묘한 느낌이 둘 사이를 맴돌고… 그들은 서로 한번 더 거리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마주친다. 그리고 베로니끄 에게는 한밤중에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말을 하지 않고 베로니끄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끟는다. 알수없는 기다림에 빠진 베로니끄에게 구두끈과 온갖 소음이 담긴 테이프가 배달된다. 베로니끄는 그 소음을 분석하여 마침네 알렉산더가 자신을 기다리는 곳에 도착한다. 그가 그녀를 기다린 시간은 이틀이 좀 넘은 시간이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소설 애기를 하며 그 속의 여주인공에게 낮선 남자가 접근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고 말할 뿐이다.
베로니끄는 뛰쳐 나가고
남자는 그 뒤를 쫓는다. 둘은 결국 다시 호텔에서 만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한다. 호텔 방에서 서로에 대한 애기를 하던 중 베로니끄는 자신이 찍은 사진 중에 베로니카의 모습이 담기ㅕ 있음을 모고 그동안 자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존재 했었다고는 느낌이 사실이었음을 깨닫는다. 남자 역시 여자의 이중적 존재성을 다룬, 자신의 소설이 현실임을 알게 된다. 똑같은 갈색머리와 눈에, 생년 월일도 같고, 어렸을 때 한 명은 손을 데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 며칠후 손을 델 뻔했다. 이 존재의 이중성을 알게 된 베로니끄는 눈물을 흘린다.
이미지와 이중적 존재
이 영화에 나타나는 형식적인 기교는 매우 뛰어나다. 핸드 핼드 카메라의 운용이나 조명의 사용은 기록 영화를 통해 단련된 감독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조명의 사용은 세련 되었을 뿐 아니라 영상의 사실적 느낌(사람 눈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살리는데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신의 촬영 감독 슬라보미르 이작과 함께 절제 되었으면서도 효율적인 조명 사용의 모범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이런 기본적인 스탭과 감독의 역량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의 통합으로 이루어지 영화다. 여기에는 분명히 즈비그뉴 프라이즈너가 맡은 음악 역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에서 '반델 부델마이어'라는 가상의 작곡가를 통해 나타난다.
이 작품은 분명히 내러티브가 존재 하지만 이것만으로 영화를 온전히 받아 들인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것은 영화의 이야기 흐름자체가독립된 이미지의 쇼트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의 통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의 내용과 일치 하면서, 관객들에게 잊을수 없는 시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이미지는 '존재의 이중성'이란 영화의 테마와 조응한다. 베로니카와 비로니끄가 동일성을 가지는 부분들은 똑같은 행위나 인물을 목격하는 것들에서 보인다. 남자 친구와 정사를 나눈 후 보이는 둘의 모습은 가장 대표적인 동일성에 대한 이미지다. 더불어 베로니카가 투명한 고무공을 통해 창 밖을 바라보는 장면(베로니끄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눈밑을 반지로 문지르는 행위, 그리고 노파를 목격하는 장면들도 그런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정치성에 대한 이미지도 곁들여진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레닌의 동상, 베로니카가 흥얼거리는 인터네셔날가의 곡조, 역시 베로니카가 광장에서 우연히 베로니끄를 목격할 때 뒤로 보이는 시위 진압 경찰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폴란드와 프랑스라는 두 주인공이 존재하는 공간의 대비등이 그 예들이다. 이 정치성의 이미지 역시 '존재의 이중성'이라는 테마에 접근해 가는 요소 중 하나인데 두 인물의 동일성에 대한 이미지와 함께 그 과정에서 양축을 이루고 있다.
아마도 영화를 통해 키에슬로프스키가 애기 하고자 하는 것은 심오하게 말하면 사회주의권이나 자본주의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비슷하다는 것이며, 두 인물의 동질성 이라는 것은 그런 인간의 보편적인 생활 양태를 의미하는 바라고 몰 수 있다. 물론 이것을 확대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키에슬로프스키 영화가 '유럽 통합'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면 이 관점에서 위와 같은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중 유력한 하나는 이런 것이다. 영화를 보면 베로니카는 베로니끄에 선행해 무엇이든지 경험한다. 손을 덴것부터 시작해 음악을 하면서 느끼는 심장의 고통등이 그렇다. 마치 베로니끄는 자기가 음악을 계속 한다면 그 역시 죽음을 맞으리라는 예감이 든 거처럼 갑자기 음악을 그만둔다. 그리고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런 베로니끄는 베로니카가 살아서 이루지 못한 것을 완결 짓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베로니끄가 아버지 집 앞에서 나무를 어루만지는 장면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인 별과 꽃과 봄에 대한 어머니들의 이야기와 맞물려 다시 부활하는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베로니카가 이루지 못하고 남긴 것들을 베로니끄가 완결했다는 상징이다. 사랑이나 삶에대한 의지, 싹트는 희망을 베로니끄는 영화 속에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이기도 하다.
즉 감독은 순환과 계승이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삶은 계속 희망을 찾아가고 또 그렇게 되는 과정이란 것을 애기하며 강조한다. 비록 한 개인이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매게의 역할에 국한되어 정작 스스로는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이런 두가지 방식의 해석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원래 영화 자체도 상당히 난해한 것이 여러 방향으로 영화가 해석되는데 일조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도 자기 영화가 다양한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으며 순전히 정치적인 영화를 찍으려 했던것도 아니었다. 파리에서 이 작품이 개봉될 때 키에슬로프스키는 17개 극장마다 각각 다른 편집판을 상영하려 했다고 한다. 비록 이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감독 자신도 다양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실례라 할 수 있다.
어쨌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화면의 미학, 음악과 조명을 이용한 '놀랍고도 아름다운'이미지의 창조가 숨쉬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세계 중 절정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
삼색 3부작 Three Colors
<블루> <화이트>
<레드>
흔히들 3부작에 대해서 당시 유럽 사회를 휩쓸었던 유럽 통합이라는 주제를 내포한 작품 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물론 이 세 작품은 모두 그런 요소들을 갖고 있고 키에슬로프스키라는 감독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것은 유력한 해석이다. 하지만 좀더 관점을 영화에만 국한 시킨다면 이 삼부작은 스타일상 키에슬로프스키가 <십계>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절정의 기량을 펼친 것을 세분해서 심화시킨 작품들이라는 관점도 타당하다. 특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스타일이나 여러 이미지들은 이 삼부작에서 작품마다 각개 약진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원한' 동료인 크쥐쉬토프 파시에비츠(각본),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음악)는 변함없이 그와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다. 제목에 대한 모티브는 프랑스 국가인 청, 맥, 적색이 각각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에서 따온 것이다.
푸른색
삼색의 첫번째 <블루>는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은 부인의 이야기이다.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그들을 잃고 자살을 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혼자 고립된 생활로 빠져든다. 사고 현장에서 자기 목걸이를 발견한 청년에게 그것을 가지라고하며, 변호사에게 살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 달라 한다. 유럽 통합을 위해 준비 중이던 남편의 악보마저 버린다. 그녀는 세상의 보든 것을 잃고 혼자 침잠되어 살아갈 뿐이다. 그녀 삶의 반전은 우습게도 자신이 새로얻은 ㅇ파트에서 자리를 마련한 쥐 때문이다. 줄리는 쥐들을 '박멸'하기 위해 이웃에게 고양이를 빌리고 창녀라고 해서 쫒겨 날 뻔한 이웃 처녀의 도움을 받는다. 이를 통해 다시 그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공동체로 돌아온다. 이제 줄리는 남편의 유작을 그의 동료였던 올리비에와 다시 만들고 그 과정에서 남편이 숨겨둔 애인을 알게된다. 하지만 줄리는 이 모든 것을 관용으로 포용한다. (혹은 초월인가?)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신을 사랑해온 올리비에를 받아 들인다.
이런 이야기 진행은 기존에 존재했던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다. 내러티브는 분명히 정치적인 색체를 보이며 궁극적으로 유럽 통합의 정신이라는 메시지의 반영이다. 줄리와 남편이 유럽 통합을 위한 음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 모든 것을 잃고 개인적으로 고립된 여인이 다시 공동체 생활로 돌아 온다는 점등에서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또 한 편으로 두드러진 것은 형식적으로, 미학적으로 여전한 이미지다. 특히 이 작품은 삼색 시리즈 중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데, 시종일관 스크린을 지배하는 푸른색은 고독한 줄리의 '차가운' 느낌과 그녀가 공동체로 재편입되는 '이성적인 희열'의 감정을 묘하게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역시 이런 영상의 색감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과 함께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동력이다.
흰 색
<블루>에서 줄리가 남편의 숨겨진 애인을 찾아 해매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여다 본 법정은 다음 작품인 <화이트>로 이어진다. 의외로 이 작품은 블랙 코메디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삼색 시리즈 중 남자 주인공을 중심에 놓은 유일한 영화다.
까롤은 폴란드, 도미니끄(줄리델피)는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다. 빠롤은 부인인 도미니끄에게 이혼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원래 자신이 다니던 미용실에 다시 출근 하지만 그것이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는 갱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얻고, 그들이 사려는 땅을 미리 산 다음 다시 팔아 넘겨 순식간에 부자가 된다. 이제 까롤은 자기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도미니끄에게 유산상속이라는 미끼를 던져 폴란드로 불러 들인다.
자기 장레식을 멀리서 지켜보는 까롤, 그는 그곳에서 도미니끄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날 밤 도미니끄의 숙소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까롤,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하지만 아침에 들이닥친 경찰은 그녀를 까롤 살해 혐의로 구속하고 이 과정에서 도미니끄는 까롤이 살아있음을 주장하려다까롤 그만둔다. 그녀는 까롤이 자기를 왜 폴란드로 불렀는지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미니끄가 수용된 독방을 까롤이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수신호로 이곳에서 나가면 당신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하고 까롤 역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으나 서로에게 상처가되는 함정만 팠다. 복수를 하려는 까롤의 의도는 '현상적으로는'이루어 졌으나 변수는 도미니끄가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런 아이러니를 코메디 형식으로 묶어 놓으면서 경쾌한 소품 하나를 만들어 냈다. <화이트>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의 상처를 통해 동등해지며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프랑스와 폴란드라는 국적의 대비와 '이혼'이란 사건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대비를 이루지만 극의 말미에서는 포용과 융화로 발전한다. 이 삼부작 중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느낌을 작고 있지만 가장 정치적인 색체가 두더러지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빨간 색
삼색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키에슬로프스키에게도 마지막 작품이 된 <레드>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젊은 고시 준비생이 보여주는 모습이 은퇴한 노판사의 젊은 시절과 동일 하다는 점은 마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보여준 존재의 이중적 측면을 되풀이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영화의 무대는 스위스, 발렌틴(이렌느 야곱)은 학생이자 모델이다. 어느 날 그녀는 밤길에서 개를 치게 되고 이를 통해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도청장치를 이용하여 이웃들의 전화를 모드 듣고있다. 발렌틴은 그의 행동이 협오스럽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이웃들에게 그 사실을 애기한다는 것은 그들의 일상을 파괴할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후 노인이 도청 혐의로 재판받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말렌틴이 찾아 오므로써 둘은 다시 만난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더 성숙한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를 보러 영국으로 건너가는 발렌틴에게 노인은 페리호를 권하고, 노인 자신이 설명했던 젊은 날의 과저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젊은이도 함께 승선한다. 말렌틴은 떠난면서 다시 돌아올 때는 강아지를 얻고 싶다고 하고 노인은 재회를 위한 즐거운 기다림에 들어 간다.
영화의 마지막, 떠난 패리호는 사고를 당해 침몰하고 생존자는 몇 명밖에 없다. 영화는 이 모습을 TV 중계로 그대로 담는데, 살아남은 생존자는 <블루>에 나왔던 줄리와 올리비에, <화이트>의 까롤과 도미니끄, 그리고 이 작품의 말렌틴과 젊은이다. 결국 삼색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그들의 국적은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등으로 다양하다.
이 마지막 장면은 정치적으로 괸장히 상징적이다. 삼색 시리즈가 애초에 유럽 통합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한다면, 이 장면은 한 배에 탄 운명이라는 유럽인들을 아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좌초한 배와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어리둥절한 모습은 통합 유럽의 장래에 관한 근심이자 불안한 마음의 우회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국 죽기 전까지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분명히 지향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에 대한 많은 우려와 근심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 때문인지 칸에서 이영화는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답지 않게 '박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정치적인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상당히 무거운 의미를 가지ㅣㄴ 영화 제목을 쓰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ㄴ 인간 사이에 구체적인 감정과 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리는 묘한 느낌을 전해 주며 그가 영화에서 표현 해내는 이미지들을 결코 경박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레드> 역시 마찬가지며 삼색 시리즈중 가장 그런 점이 완벽한 작품이다. 그의 영화 표현 기교가 굉장히 숙련되고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울림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다시 그의 영화를 회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례식 그리고 레퀴엠
키에슬로프스키는 96년 3월 13일 두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죽기전 까지도 파트너인 파시에비츠와 '천국, 연옥, 지옥'이라는 3부작 프로젝트를 추진 중 이었다. 그가 사망한 날 폴란드 방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십계>중 한 작품을 방영했으며, 크쥐쉬토프 자누쉬와 즈비그뉴 프라이즈를 비롯한 키에슬로프스키의 동료, 선배 영화인들과 추모 방송을 마련했다. 그의 장례식은 줄리엣 비노쉬, 아렌느 야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르샤바의 한 교회에서 거행 되었고, 폴란드 대 주교가 고인에 대한 기도를 했다. 레퀴엠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가 만들어 헌정했고 모래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실제 노리를 물렀던 엘즈비에타 토바르니카가 불러 주었다. 그는 포바츠키 묘지에 안장 되었다.
글/임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