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없는 불행
P11 경악의 순간들은 언제나 아주 잠깐이고, 그 잠깐이란 시간은 경악의 시간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현실의 감정들이 치미는 순간이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시 모른체해 버릴 순간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되면, 마치 지금 막 그에게 불손하게 굴기나 한 것처럼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P34 그녀는 외롭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기껏해야 반쪽일 뿐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을 채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서로를 잘 보완해 주었단다.> 그녀는 은행원과 함께한 시절을 회상하며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이 영원한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상이었으리라.
P55 <모든 게 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을 수 있는 것이 되고 단점은 다시금 다름 아닌 모든 장점의 필수불가결한 특질이 되는 것이다.
P61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
P82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쓸 이야기에 몰두했던 몇 주 동안 그 이야기 역시 나를 끊임없이 몰아대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쓴다는 행위를 통해 내 삶의 완결된 한 시기에 대해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거리감을 두어 단순히 주장하는 문장들의 형식을 구사함으로써 끊임없이 회상하는 척한 것 뿐이었다.
P86 공포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의식속에 있는 진공과 같은 공포. 생각은 막 형성되어 가는데 생각할 것이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그러고 나면 그 생각은,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 만화 영화늬 인물처럼 땅위로 추락해 버린다.
아이 이야기
P106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는 소망하는 것에 시한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P121 비현실이란 사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광기와 구별되지 않는 야만이었다. 활기를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그의 의지를 더욱 빼앗아갔다.
P156 나쁜 것은 무엇보다도 남들이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옆으로 밀쳐진다는 것, 있을 곳을 찾아 보지만 그런 곳이란 항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것이 이제는 <쉬는 시간>이 되었다.
P159 다만 언듯 볼 때면 때로는 운명에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까지 남자는 나이 든 한 인간의 두 눈에서나 그런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운명에 체념한다는 것은 극단적이고도 슬픈 폭력을 생각나게 했다.
P175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너무 나쁘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