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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소름 끼치는 짓? 그게 뭘까. 화이는 P에 대해 알아본 것뿐이다. 사랑해 달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모든 게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말하고도 싶었다.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왜 자신이 증명해야 하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마음이 왜 소름 끼치는 일이 되는 건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P 가 해야 했다. P의 와이프가 와서는 안 될 자리였다. '그게 돼요?' 그날 밤 그 질문이 화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안 돼? 누가 같이 살겠대? 그냥 따듯해지고 싶을 뿐인 데. 그러면 안 돼?' 화이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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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거짓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해졌다. 반면에 다 른 거짓말들은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지어내느라 기억도 나 지 않았다. 누군가 그걸 지적하면 "네가 잘못 기억하는 거겠 지.라거나, "난 그런 적 없어.라고 당당하게 굴면 대개는 어물 쩍 넘어갔다. 아니 넘어간 줄 알았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화 이 곁에 있던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하지만 화이는 거짓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상황에 맞게, 기분이 좀 그래서 하게 되 는, 별것 아닌 거짓말들을 아무렇게나 했다. 굳이 그럴 필요 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거짓말하는 순간엔 반드시 그 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길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듣는 상대는 대개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이는 진실 을 말하고도 스스로 거짓말 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 었다. 거짓말의 세계에선, 일이 바쁜 엄마 때문에 외로운 사춘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딸을 위해 출장지에서 돌아온 엄마 는 어린 시절엔 과자 정도에 그쳤지만, 중고등학생이 되자 가 끔은 과분한 선물, 명품 운동화나 옷, 가방을 선물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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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세계에선, 기껏 모은 재산을 사기꾼에게 털린 엄 마가 빚쟁이에게 쫓겨 도주해 버린 바람에 할머니와 살게 된 한때는 꽤 사는 집 외동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거짓말의 세계에선, 그렇게 숨어 버린 엄마가 어느 날 갑작 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화이는 소녀 가장이 되었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전개는 그녀를 만족시켰다. 다른 거짓말들, 별것도 아닌 시시껄렁한 거짓말들은 그녀 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도 했으나, 첫 번째 거짓말에서 시 작되어 나날이 정교한 서사를 쌓아 가는 화이의 인생은 세상 이 망하기 전까지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거짓말이 있었기에, 화이는 종종 동정을 샀고 가끔 호감도 얻었다. 화이는 거짓말 의 세계가 진짜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