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이라는 노동은 내게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지난 3월 13일 오전 바르샤바 병원에서 심장 수술 직호 운명을 달리하였다. 우리는 이보다 더 슬픈 소식을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가 새로운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 맞이한 어이 없는 죽음이었다. 아직도 그가 남겨놓은 영화들은 우리 시대의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조타수이며, 거의 가닥을 잡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율법과 도덕을 통해 성찰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타르코프스키와 반대의 지점에서 시작해서 인류가 맞이한 묵시록이라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얼마나 고단한 삶의 여정이었는가? 여기 키에슬로프스키가 남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 인터뷰를 그의 유언을 대신해서 남긴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관객을 동원하고 영화제에 나가고 비평이 실리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는 것을 뜻하며, 혹독한 추위와 눈비, 진흙탕과 무거운 조명기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경을 곤두세우는 작업이며 어찌 보면 사생활과 가족, 개인적인 감정 등 모든 것을 접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운전사나 사업가, 은행가들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들 말도 사실이겠지만, 나는 영화 감독이고 여기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곳이다. 아마 나는 감독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내심이다. 배우들에 대해서도 카메라맨에 대해서도, 기다림이나 날씨, 혹은 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드러내지도 말아야 한다. 스탭들에게 내가 참을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세가지 서로 다른 기회의 상상력과 비극성 <맹목적인 기회> |
영화를 만드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다. 소파와 테이블, 의자가 있는 스튜디오 한구석이 감독에게 배당된 자리이다. 그 가짜 공간에서 “조용!” “카메라!” “액션!”하고 외쳐대는 내 소리가 그로테스크하게 울릴 때마다 나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생각한다. 몇 년 전, 프랑스 좌파 신문 「리베라씨옹」이 몇몇 감독들에게 왜 영화를 만드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딴 일은 할 줄 아는게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이 너무 짧아서 시선을 끌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모든 감독이 영화에 쏟아붓는 시간과 그걸로 벌어들이는 액수를 비교하며, 혹은 그들이 무슨 특별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똑같은 자괴감을 느끼기 때문이거나. 페데리코 펠리니나 다른 감독들이 스튜디오에 집과 거리, 심지어 바다까지 설치하곤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영화 감독이 하찮고 우스꽝스런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찍다보면 그런 자괴감을 잊게 되는 순간이 가끔씩 있다. 이번에는 네 명의 프랑스 여배우 덕에 그랬다.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옷을 입고, 그런데도 주위의 모든 것이 진짜라는 듯이 연기하는 그들. 그들은 대사를 읊조리고, 미소짓고 근심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찾는다.
나는 ‘성공’이란 말이 싫다
나는 폴란드에서 작품 활동하는 것을 그만둔 게 아니다. 아직도 나는 거기서 영화를 찍는다. 물론 공동 제작은 성격이 좀 다르지만(내게 더 좋은 조건을 준다).
나는 ‘성공’이란 말을 싫어한다. 성공이란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나 자신을 그 말에 결부시키기를 거부해왔다. 내가 말하는 성공이란 나 스스로 원한 것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게 대부분 얻기 힘든 것들이라 나는 아예 성공이란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가 얻은 명성이 영화 감독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만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야심 있는 사람이고 야심의 발로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성공’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성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그러한 명성으로 내 야심은 충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감독의 야심이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인 까닭에 대신 자리한 대리만족 같은 것이다. 야심이란 결코 만족을 모른다. 야심을 불태울수록 야심을 채우기는 더더욱 불가능해진다. 명성이란 영화를 만드는 데 수반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영화를 찍으려고 돈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것보다는 한 번에 척하니 얻는 것이 편리한 건 사실이다. 배우를 구하거나 그 밖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편리한 게 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고생이 능사라는 말은 아니지만, 전혀 고생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생각에 가끔은 고생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을 것이다. 고생이 사람을 만들고 성격을 만든다.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딴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 자기 자신을 거두고 남을 생각할 줄 알게 되려면 고통이 무엇이고 고통받는 게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이고 아파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통을 모르면 고통 없는 삶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힘겨웠던 일들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은밀한 기억으로,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잊으려고 노력한다.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는 일들이긴 하지만. 확실히 그런 일은 또 생기게 되어 있고 억지로 외면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일들이다.
물론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상관없다, 살아남으려면 회피도 필요한 거니까. 폴란드에서도 나는 너무 늦게 발을 뺐다. 그것 때문에 지난 1980년엔 쓸데 없이 또 속아넘어가 불필요한 환멸을 맛보아야 했다. 진작에 깨닫고 빠져나올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혹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으로부터 도망친다. 솔직히 그런 일은 내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았다. 고립이 그처럼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내가 제일 옳고 딴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까지 나는 내가 옳다고 믿어왔다. 유일하게 실수였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늦게 빠져나왔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의 표식은 이제 그가 남긴 모든 것들로 향해 있다. <막다른 길> |
내가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국은 너무 크다. 사람들도 너무 많고, 다들 너무 각박하다. 법석도 많이 떨고 항상 요란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들 행복한 척한다. 그러나 내 눈엔 그들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불행한데, 그것을 인정하는 우리들과 달리 그들은 계속 행복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이야기할 뿐인 것 같다. 나는 성격상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영화를 찍는다는 건 매일의 생활이다. 영화 한 편을 찍는데도 1년에 절반은 촬영지에 있어야 하는데, 일년 내내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있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 어떻게든 되어버릴 것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기분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내가 상이라도 당했나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다만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 피곤해서 특별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뭔가 굉장하게 말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는 ‘그저 그렇다’가 아니라 ‘좋다’나 ‘아주 좋다’로 대답해야 하는 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말은 ‘살 만하다’ 정도니, 나는 미국 생활에 맞을 수가 없다. 두번째 이유는 미국에선 감독이 편집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큰 스튜디오는 그렇다. 감독은 연출만 하라는 것이다. 거기서는 각본가는 각본만 쓰고 감독은 감독만 하고 편집자는 편집만 한다. 물론 나도 각본은 각본가에게 맡긴다(내가 쓰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집을 남에게 맡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유 때문에도 나는 미국에 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거기 촬영장은 금연이다. 이러니 내가 미국에 끌릴 수가 없다.
게다가 나는 미국이 두렵다. 뉴욕에 있을 때도 도시가 한순간에 내려앉을 것만 같은 기분에 시달렸고 가능하면 거기 갈 일을 줄이려고 애썼다. 미국의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다. 가령 캘리포니아는 뉴욕처럼 붐비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지만 그 대신 차들이 엄청나게 질주해 과연 사람이 타고 있기는 한 걸까 의심스러워진다. 대체 운전자는 누구일까? 미국 차들은 저 혼자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나는 미국을 겁내고, 미국에 내려서기만 하면 방어적으로 변한다. 도시가 아닌 소읍에서도 사정은 같아서, 나는 여전히 피해다녔고 자기 안에 박혀지냈다. 호텔 밖 걸음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잠이 오진 않지만 억지로 노력해서 잠을 잔다. 잠자는 게 미국에서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잠드는 데 성공만 한다면).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정말 어이 없는 일이었는데, 황급히 어느 시사회에 가고 있을 때였다. 뉴욕 영화제에서 처음 참석하는 시사회였을 것이다. 84년 아니면 85년의 일인데, 영화 제목은 <막다른 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너무 급해서 나는 택시를 탔다. 비가 오고 있었는데 운전사가 그만 자전거를 치어버렸다. 우리는 센트럴 파크를 경유하고 있었는데, 그 곳도 하이드 파크처럼 차선이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하이드 파크는 평지인 데 비해 센트럴 파크는, 터널까지는 못되고 일종의 수로같은 형태로 길이 아래로 나 있었다. 운전사가 자전거를 박은 곳은 바로 거기였다. 해질녘이라 날은 이미 어두웠다. 어둡고 비는 오는데 자동차가 자전거를 박은 것이다. 타고 있던 사람이 나가떨어지고 자전거는 완전히 차 밑에 깔려 버렸다. 길은 매우 좁았다. 2차선밖에 안 되는 도로에 프랑스 자동차의 두 배는 되는 차들이 양쪽으로 꽉 막고 서 있었다. 운전사는 자전거를 치자 얼른 내렸다. 우리는 같이 그에게 달려갔다. 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나도 도와야 했다. 자동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끝없는 차량 행렬이 우리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2, 3마일에 걸쳐 엄청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경적이 울리고 라이트가 번쩍이고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죽음을 선고하는 판정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
상영 시간이 5분 뒤로 다가오자 나는 운전사에게 택시비(5, 6달러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를 건네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택시 운전사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택시 한 대는 서 있고 남자가 거기서 도망치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들은 내가 운전사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강탈, 협박을 했거나 아니면 죽였을 거라고. 그럴 것이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링컨 센터에 도착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택시들이 나를 좇아오고 있었다. 그 뿐인가, 라이트로 신호하며 줄줄이 멈춰 서더니 운전사들이 내려서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더욱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사회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나는 미친 듯이 내달려 공원과 차선을 구분해놓은 벽을 타넘고 공원 쪽으로 내려섰다. 그런데 거기서도 택시 한 대와 도망치는 사내가 보였던지 택시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들 역시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야구 방망이까지 들고 있었다. 그 길고 엄청난, 한 대만 맞아도 머리가 박살날 것 같은 야구 방망이를 말이다. 그들은 그것을 차 위로 흔들며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좇아오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숨겼다. 나무가 무성했는데 택시는 그 사이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 덕에 살아난 것이다. 나는 진흙 투성이가 된 채 링컨 센터에 도착했고 왜 늦었는지 설명했다. 5분이나 10분 정도 늦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미국이 싫어진 건 아니다. 그것은 재미있는 모험이었다.
코미디란 게 아마 그런 것일 거다. 자기가 당한다면 전혀 재미 없을, 그러나 구경할 땐 배꼽을 잡게 되는 상황 속에 인물을 집어넣는 것이다. 나는 진짜 코미디언을 쓰는 영화는 찍어본 적이 없지만 코믹한 영화는 찍어보았다.
내 작품 가운데는 찍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자책하진 않는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특히 주제나 각본이 전혀 내게 와닿지 않았던 경우, 또 그 반면 만들고 싶었지만 만들지 못한 다큐멘터리도 많다. 장편 극영화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쓴 각본은 모두 영화화했고, 만들고 싶었는데 만들지 못한 경우는 (내 기억에) 한 번밖에 없었다. 그러니 영화화를 꿈꿨건만 좌절된 각본들이 서랍을 채우고 있지는 않다. 영화로 만들려다 실패한 작품은 15년 전에 쓴 것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한때 야첵 카즈말스키와 작업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지금은 뮌헨에 있지만 그의 노래는 정말 아름다웠고 <맹목적인 기회>에서 단역을 맡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를 염두에 둔 작품, 다시 말해 그를 위한 배역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는 놀라운 힘과 에너지의 소유자였고 그의 행동에서는 분별과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를 위한 영화가 있어야 했지만 나는 각본을 쓰지 못했다. 그가 망명길에 오르고 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초로의 신사로 뮌헨에 살고 있는데, 예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찍고 싶었던 다큐멘터리(그랬다면 지금쯤은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는 이제는 세상을 뜬 정치가들(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의 대화였다. 나는 그 아이디어를 국립 다큐멘터리 스튜디오(WFD)에 제출하고 고물카와 치랑키에비츠, 모차르와의 인터뷰를 신청했다. WBF도 수락하고 노력을 기울여서 몇 사람으로부터는 인터뷰 약속도 받아낸 모양이었지만, 결국 합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노동자들>(71)을 찍고 난 다음이었으니 그 때가 1970년대였고, 나는 당시 정치가들이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더도 필요 없었고 단지 그들 간의 대화면 족했다. 다른 것을 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영화를 찍은 뒤엔 공개하지 말고 그대로 자료실에 보관하자고까지 제안했다. 그냥 사료로 남겨 놓자고 말이다. 요령 있게만 했으면 그들이 뭔가 사실을 말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 밖에도 찍지 못한 다큐멘터리가 많다. 그 중 일부는 <카메라광>에 담았다. 주인공 영화광 필립이 만드는 아마추어 영화들이 그것이다. 포장도로에 관한 다큐멘터리, 난쟁이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등. 영화광 필립 모츠는 그런 영화를 만든다.
돌아보면 다큐멘터리나 극영화 양쪽으로 쓸데없는 작품들이 몇 개씩 있다. 왜 찍었는지 알 수 없는 작품들이… 그 한 예가 <상처>이다. 그 영화는 순전히 영화가 찍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다. 단지 영화가 찍고 싶어서 영화를 찍는 것, 그것은 감독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다. 영화를 찍는 데는 다른 동기가 있어야 한다.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라든가 누군가의 운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러나 영화 자체가 하고 싶어서 영화를 찍어서는 안 된다. 내 가장 큰 실수는 그렇게 영화를 찍은 것이다. 이제는 왜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는 영화를. 물론 찍을 당시엔 그것을 찍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본심은 언제나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단지 일을 하기 위해 그것을 찍었다. 그런 예의 또 하나가 <짧은 날의 산보>이다. 무엇 때문에 그 영화를 찍는지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쓸모 없는 다큐멘터리도 많이 찍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훔쳐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랑의 근원에 관한 질문 |
또 한 가지 실수는 정치와는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가능한 한 멀리, 그래서 영화 속 어디에도, 배경으로라도 정치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물론 영화학교에 들어간 것이 최대의 실수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화계는 세계 어디나 별로 좋지 않은 상태다. 은혼식이란 부부가 서로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 때 의미있는 것이지 서로를 지겨워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할 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행히도 영화 산업이 그렇게 된 것 같다. 영화계는 관객이나 대중에게 이제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그 결과 영화 자체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관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인은 다르다. 그들은 주머니 생각을 하기 때문에 아직도 대중에게 관심을 기울인다(관심의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관심은 관객의 정신적 삶에 대한 관심이다. 표현이 좀 거창하긴 하지만, 어쨌든 박스 오피스 이상의 뭔가를 뜻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박스 오피스에 너무 집착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훌륭한, 정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들을 생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 직결되지 않는 고차원적 욕구는 일반적으로 무시되어왔고, 관객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사실, 오늘날 그런 욕구는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감독의 책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내 작품을 보는지 잘 모르겠다. 네덜란드였던가, 영화제에서 한 번 내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은 난다. 그러나 그것은 관객 연령층을 알아보러 몇 분 동안 들여다 본 것뿐이었다. 연령층이 높다는 걸 확인하고는 두번 다시 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관객은 영화가 자기 이야기 같았다든가 자기를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전에 베를린에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광고를 보고 나를 알아본 한 여성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는 쉰쯤이었는데, 함께 사는 딸과 싸운 뒤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열아홉 된 딸과 함께 무려 5, 6년 동안, 버터가 떨어졌다든가 열쇠가 어디 있다든가 몇 시에 들어왔다든가 하는 말만 나누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틀림없이 또 싸울 것이고 그나마도 이틀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러니 하루 5분만 기분이 좋아도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그 5분에 기여한 것으로 이미 역할을 다 했다. 그 딸은 아마 자기와 엄마 사이를 그렇게 만든 원인과 비슷한 상황을 영화 속에서 본 모양이었다. 같이 영화를 보면서 그녀는 무엇이 그들을 싸우게 만들었는지 이해한 듯 엄마에게 키스를 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보고 내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라고. <카메라광>을 찍고 나서도 그런 편지를 많이 받았다. ‘영화광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죠? 그건 내 영화였어요. 나를 그린 영화요. 당신은 나에 관한 영화를 만든 거예요’ 라든가 ‘당신은 나를 완전히 아는 것 같아요. 어디서 날 알게 되셨죠?’라든가 하는 편지들을. 작품마다 그런 편지를 많이 받았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때도 마찬가지여서, 한 소년은 그 영화가 자기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어떻게 풀어갈지 확실하지 않은 채로 시작해서 (주인공은 감독 자신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실제 삶과 똑같아지는 것은 즐겁고 신기한 경험이다.
여섯번째 계명 : 간음하지 말라 |
이런 경우도 있었다. 파리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15세 소녀가 다가와 방금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벌써 세번째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한 가지만 확실히 말하겠다고 했다. 바로 ‘영혼이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가치 있었다. 꼬박 1년을, 돈과 시간과 정력과 인내를 투자해서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죽여가며 수천 가지 결정을 내리면서 만든 것이, 파리의 어느 극장에서 한 소녀에게 정신의 실재를 확신시켜 줌으로써 충분히 보상받았다. 정말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최고의 관객이다. 그런 관객이 많지는 않겠지만 항상 있기는 한 것이다.
일요일의 영화들
우정의 이름으로 보내 온 세 가지 질문에 답하겠다. 그러나 이런 질문으로 영화나 영화 감독의 정신 세계를 조명할 수는 없을 거라는 나의 충심어린 견해도 덧붙인다. 다가오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며 많은 잡지들이 여러 감독 및 배우 혹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영화, 영화감독, 배우를 꼽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흥미는 있을 것이다. 일전에 「사이트 앤 사운드」도 내게 가장 영향을 미친 영화 열 편을 적어 달라고 부탁해왔다. 여기 그 리스트가 있다(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1위든 10위든 상관 없다).
페데리코 펠리니, <길>
켄 로치, <케스>
로베르 브레송, <저항>
보 비더베르그,
<유모차>
이반 파세르, <친밀한 빛>
카라바스, <일요일의 음악가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이반의 소년 시절>
프랑소와 트뤼포, <400번의 구타>
오손 웰즈, <시민 케인>
찰리
채플린, <키드>
아홉 편의 영화들은 당신이 익히 아는 작품들이다. 이제 당신이 모르는 한 작품,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 중요한 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스물, 아니 서른 명 가까운 사내들이 침침한 홀에 들어선다. 그것은 당시 사회를 대변하는, 소위 ‘중간 규모 산업 조직’이라 불리는 장소같이 보인다. 몇 년 동안 청소라곤 하지 않은 바닥에 벽지는 벗겨지고 부러진 의자와 흠집 난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다. 때는 저녁. 막일로 두툼해진 손바닥과 마디 굵은 손가락이 그들이 노동자임을 말해 준다. 감독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웅변할 생각이 없다. 관객 스스로가 단지 10분의 관찰을 통해 그들이 격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임을 알아낼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마흔 고개를 넘기고 있다. 그들은 낡은 상자에서 악기를 끄집어낸다.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 만돌린, 기타와 아코디언이 나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는 없다. 악기는 전부 조야하다. 지휘자는 연주자들보다 더욱 고령이다. 은발 머리와 수염이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인다. 그들은 삐걱이는 악보대에 악보를 올려놓는다. 콘서트 홀이나 오페라 하우스의 위용을 느끼게 하는 것은 지휘자의 지휘봉 뿐이다. 그것만은 훌륭해서 시선을 붙든다. 그들은 자리에 앉는다.
모두가 거의 엄숙하게 안경을 낀다.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지휘봉만 빼고는 모든 것이 시대를 말해 준다. 안경은 모두 약품점에서 구입한 일레스토플라스틱(당시엔 셀로판 테이프가 없었다)으로 코걸이나 안경 다리 부분을 땜질한 것이다. 스크린은 그것을 모두 선명하게 보여준다. 몇 사람, 가령 지휘자의 안경은 알이 깨져 있다.
카라바스의 <일요일의 음악가들>은 50년대말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권위 있는 단편영화제였다. 이 영화는 몇몇 나라에서 공개되었는데, 네덜란드의 한 안경 제작자는 영화를 보고 카라바스에게 주인공들의 시력 상태를 물어왔다. 몇 달 뒤 그들은 모두 네덜란드제 새 안경을 선물받았다. 당시 폴란드에선 안경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다섯번째 계명 : 살인하지 말라 |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그들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의 연주는 어설프다. 쉬운 곡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악기는 그런 소리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탁탁거려 연주를 중단시킨다. 처음 연주하는 곡도 아닌데 연주자들이 전부 먼젓번 연습 때 배운 것을 잊고 있어 짜증이 난 것 같다. 그는 이성을 잃고 고함까지 지른다. 그러나 빌니우스(전쟁 전에 동 폴란드에 속해 있던 도시) 출신인 그의 억양은 대부분의 폴란드인 귀에 아주 부드럽게 들려, 가장 격한 표현조차 속삭이듯이 울린다. 그들은 연습을 계속한다. 점차, 몇 번의 중단(그 때마다 지휘자는 각 연주자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허밍으로 곡을 설명한다) 끝에 멜로디가 잡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6, 7분이 지나면 마침내 곡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1, 2분간 우리는 인물들만 바라본다. 그들의 손과 얼굴을 바라보며, 유연하게 연주되는 음악을 감상한다. 이윽고 카메라가 어두운 실내를 벗어난다. 와이드 쇼트가 새벽녘의 전차 정류소를 잡는다. 때묻은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보인다. 그들은 각종 크기의 망치와 집게, 모루들을 들고 있다. 첫번째 전차가 정류소를 떠나고, 그들은 그 날 하루 시내 운행을 하지 않는 전차에 매달려 일을 계속한다. 연장 소리가 음악과 한데 섞인다. 엔드 크레딧이 나온다.
카라바스는 연주자들과 몇 개월을 보냈고 리허설 때도 함께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인간의 창조 욕구를 그처럼 아름답고 간결하게 표현한 영화는 드물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기본적 욕구 외에도 삶에 의미를 주고 그 질을 고양시키는 무언가를 항상 갈구한다. 성취하기 힘든 만큼 해냈을 때의 기쁨은 배가된다. 을씨년스런 공간에서 깨진 안경을 두르고 단순하기 그지 없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중년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기쁨을 읽게 된다.
청탁받은 분량이 넘었으므로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감독들 중에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길>의 줄리에따 마시나가 여배우 가운데는 제일이라 생각하며, 남자배우 중에는 <위대한 독재자>를 비롯한 모든 출연작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 찰리 채플린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 KINO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