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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존재의 가치를 구하는 사색가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외우기도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폴란드 감독의 88년 작품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뒤늦게 서울 개봉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이 작품은 어쩌면 한국의 영화관객이 마지막으로 보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레드>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한 선언을 거둬 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때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최후의 영화예술가' 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던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 풍경은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 이다.


'세가지 색' 연작끝으로 유럽합작시대 마감

94년 베를린영화제. '세가지 색' 연작중의 두번째 작품인 <화이트>를 영화제에 내놓았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세가지 색' 연작 뒤에 더이상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다고 발표해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거장의 퇴장은 화려하지 않았다. <화이트>가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객석 일부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해 5월의 칸영화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평론가들에 의해 그랑프리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던 <레드>는 쿠엔 티란티노의 <펄프픽션>에 밀려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는 여러해의 유럽합작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조국인 폴란드로 돌아갔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은퇴에 대해서는 그뒤로도 말이 많았다. 텔레비젼영화 <십계>중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극장용 영화로 재편집돼 개봉된 88년 이래 유럽영화계는 이 폴란드 감독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 연작 등 키에슬로프스키의 90년대 작품에는 폴란드 외에도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자본을 됐다. 유럽영화의 얼굴로 부상하는 시점, 바로 그 시점에 키에슬로프스키는 퇴장한 것이다. 일부에서 '세가지 색' 연작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듣고 있던 터였다.

매너리즘 ? 94년 5월 홍콩에서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를 만난 키에슬로프스키는 은퇴 이유에 대해 그저 지쳤을 뿐이라고만 말했다. "영화 제작은 인내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갑자기 내 기력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더이상 영화 만들 힘이 없다. 난 이제 늙었다. 지난 20년간 평범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지쳤다'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말은 폴란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어쩌면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이 아니라, 변화만 있고 발전은 없는 폴란드의 현실일지 모른다. 모국의 현실 앞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의욕을 잃은 것 같다. 폴란드의 전망을 묻는 토니 레인즈의 질문에 "먼저, 우리모두 다 죽어야 한다. 그럼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세대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45년 동안 쌓여온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키에슬로프스키는 '과격하게' 말했다.


기록영화 출신 "도덕적 불안의 영화"

키에슬로프스키는 그야말로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왔다. 그가 68년 로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69년 <사진>이란 기록영화로 데뷔하면서 영화감

독으로 살아온 동안 폴란드는 바람 잘 날 없었다. 68년 3월의 학생봉기, 70년 12월의 자유화 운동, 76년 노동자 시위사태, 80년 례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 노조운동, 그리고 81년 야루젤스키 정권의 계엄령 선포에 이르기 까지

그러나 폴란드 사회가 그렇게 혼란을 격는동안 폴란드 영화는 부흥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 아그네츠가 홀란드, 안토니 크라우즈, 리쟈드 부가예스키, 마르셀 로진스키 등의 감독이 폴란드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뤄냈다. 여기엔 '도덕적 불안의 영화'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안제이 바이다 감독 등이 이끌었던 '폴란드 유파'가 폴란드 영화의 현대적인 어법을 발굴해냈다면, '도덕적 불안의 영화' 세대는 긍정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폴란드 현실을 불안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집어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물론 '도덕적 불안의 영화'계보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경향을 이끈 감독 이기도 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자산은, 기록영화감독 출신답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기록영화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낸 다는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기록영화 중에는 유명한 작품이 많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노동자들 '71>. 71년 슈체친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사태를 찍은 것이다. 74년에는 <첫사랑>이란 기록영화로 크래코우 국제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처음으로 만든 극영화는 <어느 당원의 이력서>, 75년 텔레비젼 방영용으로 만든 작품 이었는데, 독일 만하임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어느 당원의 이력서>는 50분짜리 중편영화지만 평자에 따라서는 키에슬로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치기도 한다. 한 폴란드 공산당원이 징계문제로 당 조사위원횡 호출되어 심문받는 과정을 기록영화 형식에 담은 이 작품은 50분 동안 심문관과 피심문자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계속 이어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놀라운 작품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76년에 만든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 <상처>는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작품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도덕적 불안의 영화'세대의 지도자로 국내외에서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도덕적 불안의 영화'가 어떤 밀학적 수준을 떨쳤던 폴란드 사회를 움직일 힘은 없었다. (안제이바이다 조차도 언젠가 "나는 내 영화가 1%의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고 절망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연대노조운동이 세를 뻗히던 80년에 만들어지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 <맹목적인 기회>는 81년 야루젤스키 군사정부가 집권하면서 상연금지 당했다.

그러나 폴란드 현실과 대좌한 이 폴란드 감독에게 곧 서 유럽영화계쪽으로 길이 열렸다. 그 계기는 바르샤바 텔레비젼에서 방영된 <십계>연작이다. 84년에 <결말없음>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각본을 쓴 변호사 출신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는 <십계>의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이 연작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십계>가 극장판으로 개본되는 과정에서 서유럽 자본이 들어왔고, 이런 공동 작업체제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피시비츠의 조력을 받으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최대의 관심을 모은 '세가지 색'연작은 평가가 좋지 않았다.



존재의 가치를 구하는 사색가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최후의 영화예술가'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역사의 갈피에서 나를 만나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섬세하고 화려한 화면의 깊이에 매혹당했던 사람들은 '세가지 색'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운명론적인 도식이 너무 지루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질적으로 운명론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 이념을 주제로 한 '세가지 색'은 인간 본성이 그런 이상과 충돌하는게 아닌가라는 우울한 진단으로 가득차 있다

"이상이 무엇이든 실제 형편이 어떠한가? 개인의 범주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가?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다." 그러나 키에슬로프스키의 작업은 단순하지 않다. 선험적인 도식으로 꿰맞춰지지않는 인간의 내면과 당대의 현실을 두루 통찰하는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는데 그는 영화 역사의 뒤로 물러나 버렸다.

"영화 100년이니 축하를 해야 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바랄수 없다. 푹 가라앉아서 새로운 표현을 할 기력도 없다. 영화 관객도 상업주의에 젖어버려 비극의 끝을 달리고 있다. 정말 발 밑이 무너지고 있는데 우린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키에슬로프스키는 일본판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대담에서 밝혔다. 정말 키에슬로프스키는 비관주의에 빠져 영화를 영영 만들지 않을 것인가. 토니 레인즈는 작년 홍콩에서 그와 헤어지기에 앞서 "당신이 그리워질거요"라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걱정하지 마세요 곧 누군가 새로운 감독이 등장할 것입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소식, 인터넷 통신의 키에슬로프스키 홈폐이지는 키에슬로프스키가 최근 피시비츠와 함께 새 영화의 기획에 착수하고 있다고 전한다.



섬세한 화면 화려한 깊이

유럽영화의 얼굴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세계


현 대 의 십 계 명 은 무 엇 인 가

<십계>/ 88년/ 각 58분/ 성베네딕트 출시


모세의 율법, 십계명, 칙칙한 분위기의 바르샤바시에 사는 사람들의 일화를 통해 키에슬로프스키는 모세의 율법 열 가지를 현대식으로 새롭개 건더려 본다. 이를테면 '계명 1 :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편에서 학자인 주인공 폴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시ㅍ어하는 아들의 간청에 컴퓨터를 켜고는 호수의 얼음이 아들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복잡한 계산에 도전한다. 마침내 아들이 스케이트를 타도 된다는 해답을 얻었을때 그는 아들이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1편에서 10편까지 모세의 십계명을 현대 도시의 일상에 적용하는 방식식은 독창적이고 기상천외하다.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가 낡은 도덕률을 가조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이상 나아간다. 현대의 일상에서 성경의 십계명은 얼마나 유효하며 얼마나 지켜질 수 있는가. 그것을 묻고 있지만 답은 없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일상생활의 도덕이 온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 연작의 백미는 '살인하지 말라'편, 대사도 별로없이 살인과 사형 다시말해서 개인과 국가가 행하는 두 가지 살인을 보여 주는데 살인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간음하지 말라'편 역시 뛰어나다. 주이공 토맥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마그다를 훔쳐본다. 마그다는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성이지만 생활이 난잡한 편이다. 그러나 토맥의 부정한 욕망은 사랑으로 승화돼 가는 반면에 마그다는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감정을 들켜버린 토맥에게 마그다는 자신의 육체를 가지라며 유혹한다. 그건 토맥의 감정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다. 그래서 토맥은 자살을 기도한다. 뒤늦게 토맥의 진심을 받아들인 마그다에게 토맥은 이젠 엿보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사랑없이 행위하지 말라는 식으로 딱딱한 종교적 이해를 깔고 받아들일수도 있다. 항상 인자하게 토맥을 보살피며 어전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토맥 친구의 어머니도 이 영화의 종교적인 분위기에 한몫 모탠다.

그러나 보석처럼 빛나는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본다는 것'에 대한 성찰에 있다. 대다수의 상업영화에서 부정한 욕망의 대리충족 통로로 삼는 관음증을 키에슬로프스키는 좀더 긍정적 으로 해석한다. 마그다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토맥은 처음에는 그저 엿보기 충동에 매달린 어린애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그의 엿보기 충동이 진실한 사랑임을 알게된다. 본다는 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순전히 보는자와 보이는 자의 화면 연결만 갖고 이런 이해를 끌어낸다는 것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뛰어난 영화화술 수준을 알수 있다.

'살인하지 말라'와 '간음하지 말라'는 극장판으로 재편집 됐다. 극장용 편집판이 텔레비젼 방영판보다 더 낫다. 이야기의 간결성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세부묘사의 힘이 더 실렸다. 이중 '간음하지 말라'편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다.









서구와 동구의 현실에 대한 은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1991년/ 97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The Double Life Veronique'라는 원제목을 번역한 이 우리말 제목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동구의 폴란드와 서구의 프랑스에 사는 똑같은 외보의 두 처녀에 관한 이 영화의 줄거리를 따져본다면, 제목을 '두 베로니크의 삶'이라 고쳐 부르는 게 더 온당하겠다.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는 둘 다 아름다운 성악도이며 게다가 습관도 비슷하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반영체 이를테먀ㄴ 거울이나 유리의 표면은 '분신'이라는 모티브를 효과적으로 가리킨다. (비디오판에서는 이런 섬세한 장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수수께끼같은 작품이다. 베로니카는 심장질환으로 영화 중반에 사망한다. 베로니카가 죽었을때 파리에 사는 베로니크는 갑자기 어머니가 죽었을때와 같은 슬픔을 느낀다. 베로니크는 무엇에라도 홀린듯 신비한 영감에 이끌려 이미 죽은 베로니카의 영혼과 일체감을 느끼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건 베로니크의 애인 알렉상드르가 쓰는 소설의 내용과 /독같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끝가지 아렉상드르가 쓰는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 두 여성의 운명이 결정 되는지 두 여성의 이야기에 암시를 얻어 알렉상드르가 소설을 쓰는지의 여부는 밝혀주지 않는다. 나중에는 심지어 이 이야기마저 알렉상드르의 소설 내용이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허구와 사실의 경계 존재의 정체성에대한 어려운 성찰은 뜬금없이 전개되지 않는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베로니크가 베로니카의 존재와 합쳐지는 과정에 서구와 동구의 현실을 끌어넣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사랑의 본질

<블루>/ 1993년/ 100분/ 컬럼비아 출시


'세가지 색' 연작은 유럽통합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자본을 주축으로 기획되었고, 이 기획의 이행은 폴란드 감독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역사적 이벤트를 축하하기보다는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은 세기말을 맞아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 그러나 혹시 인간 존재의 운명은 조화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블루'는 자유를 상징하는 색. 그러나 영화 <블루>에서의 자유는 사랑과 맞선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자 쥴리는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에 현재의 자기를 잃어 버린다. 사랑의 감정이 자유를 구속하는 격이지만 남편이 실은 따로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쥴리의 혼란, 구속감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깨어지기 쉬운 본질, 사랑은 그걸 감추는 편리한 함정에 불과하다.

쥴리는 남편의 조수인 올리비에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운명이 반복 될지도 모른다. 쥴리와 올리비에는 남편이 남긴 미완성 악보를 완성하기로 한다. '천사의 언어로 노래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죽은 노래와 같아요.'로 시작되는 이곡은 사랑만이 구원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곡은 유럽통합을 축하하는 음악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감싸는 유럽통합에 대한 축하 메시지는 왠지 비관적인 심정을 감추는 역설같다.






사랑하고 싶다면 평등을 구하라

<화이트>/ 1993년/ 90분/ 스타맥스 출시


<블루>는 자유를 얻기위해 사랑의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화이트>는 사랑을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흰색은 평등을 상징한다.) 파리에서 바르샤바로 공간이 옭겨 지면서 이제 평등의 의미는 좀더 구체적인 것이 된다. 평등하지 않은데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까.

폴란드인 카롤은 프랑스인 도미니크에게 버림 받는다. 카롤의 성적 능력은 위축돼 있다. 그건 그가 폴란드인으로서 프랑스인인 도미니크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무관하지 않다. 폴란드에 도착한 카롤은 미용사로 일한다. 카롤의 미용기술은 최고이며 손님들이 늘어 나지만 카롤은 만족하지 않는다. 카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도미니크에게 복수한다. 카롤이 도미니크와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부와 힘이 있어야 했다. 엄밀히 말해 이 평등은 많은 것을 나누는 평등이며 적은 것에 만족하지 않는 평등이다

소유가 없는 평등의 의미는 막연하다. 소유가 개입된 평등의 의미는 그러나 엄혹하다. 그래서 <블루>가 심리드라마 였다면 <화이트>는 사회풍자물인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표면상으로 해피앤딩 이지만 더 많은 소유를 전제로 한 터에 평등에 기초한 사랑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것을 의심쩍게 묻고있다. 속임수를 쓰서 출세한 카롤은 자기의 가짜 장레식에 도미니크를 부른다. 장레식에 나타난 도미니크에게 카롤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밝힌다. 두 사람의 사랑은 회복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진정한 답은 사랑에 있다.

<레드>/ 1994년/ 103분/ 스타맥스 출시


빨간색이 상징하는 것은 박애, 그래서 '세가지 색'의 완결편 <레드> 는 (<화이트>에서 암시했듯이) 더 많은 소유가 답이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 될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학생이자 패션모델인 발렌틴은 집에 가는 도중에 차에 친 개를 발견하고 개의 주인인 은퇴한 한 노판사를 찾아간다. 판사는 잃어버린 개를 찾아준 발렌틴의 호의를 비웃는다. 발렌틴은 판사의 괴팍한 성품에 감쳐져 있는 고독을 감지한다. 판사의 고독은 <블루>의 쥴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을 잃어버린 자가 받게되는 형벌이다.

불가해한 우연이 계속 일어난다. 발렌틴의 옆집에 살고있는 고시생 오귀스트는 발렌틴이 떨어트린 책 덕분에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발렌틴과 오귀스트가 부딪힌 그날은 발렌틴이 판사의 개를 찾아 주던 날이기도 했다. 우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판사가 사랑했던 여인에게 실영당했던 경험을 오귀스트는 한치의 차이도 없이 현재 속에서 반복하고 있다. 판사는 실연당한 오귀스트를 구원하려는 듯이 발렌틴과 오귀스트를 맺어주려 한다.

운명은 판사편인 것 같다. 발렌틴, 오귀스트가 탄 영국행 배는 항해중에 침몰하고, 노판사는 텔레비젼을 통해 오귀스트가 바렌틴을 부축해 배에서 나오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러나 이 해피앤딩은 진정한 박애가 아니다. 패리호에 탄 나머지 천여명의 승객은 구조되지 못했다. 같은 배에 탄 오귀스트의 전 애인과 그녀의 현재 애인도 구조되지 못했다. 우연의 운명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박애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 <레드 - 박애편>역시 부롼전한 결말이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이렇개 저렇게 굴절된다. 그것들은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미묘하고도 복합적인 삶의 편린들에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불가해한 우연으로 점철된 삶을 끈질기게 바라본다. 놀라운 것은 이 사색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당대의 역사적 전망까지 포괄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