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rzysztof Kieslowski/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영혼, 진실, 시간을 잡고 싶었다.

영혼, 진실, 시간을 잡고 싶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말하는 '장인으로서의 나' 그리고 '나의 작품'


당신은 어째서 프랑스적 모토, 자유, 평등, 막애에 관심을 두게 됐나.

내가 십계명에 관심을 두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다. 열개의 율법은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세 단어들-자유, 평등, 박애-또한 마찬가지다. 수맥만의 사람들이 이같은 이상을 위해죽어간다. 우리는 이 이상이 정확히 어떻게 실현되고, 오늘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결국, 당신의 관심은 삷이군요. 이것이 당신이 디자이너라는 첫번째 직업을 버리고 로츠의 학교로 가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이유인가.

나는 이미지를 통해서 내가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 그때는 리차드 리콕, 요리스 이벤스 같은 위대한 다큐멘터리 작가들의 시대였다. 오늘날 TV는 이러한 영화에 종언을 고했다. TV는 세상의 복잡함을 들추지 않는다. 단순한 사고를 하는 단순한 보고를 좋아할 뿐이다. 이것은 희다. 저것은 검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따위의...

세가지 이념에 관한 연작은 어떻게 구성하게 됐나. 우리는 그 세 가지 이상을 골똘히 탐색했다. 그것들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살펴 보았다. 개개인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우리는 이 이념들이 인간본성과는 모순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당신은 그 이념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 평등, 형재애를 원할까? 그저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좋아했던건 아닐까? 우리는 항상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당신은 픽션으로 전환했나. 여전히 매우 밀접하게 실제적인 삶에 집착하지만만.

내가 생각하기앤, 삶이 문학보다 더 지적이다. 그리고 다큐맨터리 작업을 오래했던 것은 내가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데 축복인 동시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대본이 단지 어떤 방향만을 지시해 준다. 아무도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촬영 과정에서 최대한의 자료를 얻게 되는 거라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창조되는 것은 편집과정에서이다. 요즈음에도 나는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데 내가 촬영한 것은 실제로 스토리가 아니다. 단지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할 뿐이다. 촬영할 때, 대본에 포함되지 않은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 넣고 편집과정에서 많이 잘라낸다.

당신은 스스로를 예술가(artisan)가 아니라 장인(artisan)이라 칭하는데

진정한 예술가들은 해담을 알고 있다. 장인의 지식은 그의 기술의 한계 안에 머문다. 예를들면 난는 렌즈에 관하여, 그리고 편집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다. 카메라의 가각 다른 버튼느이 용도와 마이크 사용법도 조금 안다. 난 모든 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진정한 지식은 어떻게 살아야지, 왜 사는지...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다. 당신은 그 영화들을 왜 각기, 간격을 두고 찍었나.

우리는 <블루>를 시작했고, 92년 9월 부터 11월까지 촬영했다. 그 마지막 날에 두 영화의 주인공들을 모두 볼 수 있는 법 장면 때문에 <화이트>의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법정 안에서의 촬영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허가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이용해야 했다. 우리는 그 첫부분이 파리에서 일어날 것이므로 즉시 <화이트>의 30%를 촬영했다. 그리고 난 뒤에 그것을 끝내기위해 폴란드로 떠났고 10일간의 휴식뒤 스위스로 떠났다. 제노바에서 93년 3월부터 5월까지 <레드>를 촬영했다.

세 영화에서 모두 같은 스태프들과 일했는가.

촬영감독은 달랐지만 나머지들은 음악, 조명, 음향은 같았다. 우리는 <십계>에서 호흡을 잘 맞췄고 그래서 같은 작업팀을 계속 이끌고 나올 수 있었다.

세 영화 촬영을 마치기 전에 편집을 시작했나.

그렇다. 촬영 첫주부터 벌써 편집을 병행했으며, 촬영중 짬이 나면 편집에 매달렸다.

당신의 영화는 더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일수록 더 형이상학적으로 보인다. 당신은 더 많은 클로즈업을 통해 주인공들이나, 사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현상적이거나 물질적인것들 넘어의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나는 형상적인것 넘어의 것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렵다.

당신이 잡고자 하는게 무엇인가

아마도 영혼일게다. 어떤 경우에서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진실, 혹은 도망치면서 잡히지 않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당신은 복음서의 베로니끄를 마음에 두었나.

나중에 그랬다. 이름을 고를 때는 아니었다. 그리고 미리 계산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훌륭한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레드>를 위해서는 이렌느 야곱에게 어렸을적 가장 좋아했던 이름을 물었다. 그때, 그는 '발렌티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발렌티네로 했다. <화이트>때는 채플린에대한 경의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카롤(폴란드어로 찰리)로 했다. 작은 남자는 소박하면서도 약았다는 점에서 채플린적인 면이 있었다.

십계는 우연한 만남으로 가득하다. 약간은 실패했고 약간은 성공했다. 그리고 삼색 에서는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연한 만남을 좋아한다. 삶은 그것들로 가득 찼다. 매일,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숱한 사람들이 우리 켵을 스쳐 지나간다. 이순간 이 카페에서 낮선 사람들 켵에 앉아있다.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서 떠나고 각자의 길을 갈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연한 만남은 오히려 <살인에관한 짧은 필름>에서 보다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살인에관한 짧은 필름>에서는 미래의 살인자와 변호사가 서로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삼부작에서 그들은 한 작품과 다른 작품의 관련점을 찾기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의 기쁨을 위해 만난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게임과 같다.

각 영화에서 쓰레기통에 병을 집어 넣으려고 애쓰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단지, 늙음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어서 쓰레기통에 병을 넣을 힘조차 남아있지 앟게 될 그런 날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분이다. <블루>에서 이 장면이 '선행'에 관한 대목으로 비칠까봐 일부러 그 이미지를 과다하게 노출 시켰다. 나는 줄리가 이렇게 그 여자를 보지 않고 그리고 그앞에 놓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화이트>에서 캐롤은 이사람이 자신보다 더 곤궁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미소 짓는다. <레드>에서 우리는 발렌티네의 동정심에 관해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러나, <레드>는 당신이 박애정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블루>의 끝은 줄리엣이 울 수 있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나? 내겐 낙관주의란 가령 팔짱을 끼고 일몰로 걸어 들어가는 두 연인이다. 혹은 일출 속 일수도 있겠고 당신이 어느 쪽을 마음에 들어하던 간에 그러나 당신은 <블루>를 낙관적인 것으로 � 보았는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해피엔딩이 블랙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안에 있다.

감옥으로 아내를 면회가는 한 남자, 당신은 이것을 해피엔딩이라 생각하나.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의 이야기가 그는 바르샤바에 그녀는 파리에 둘다 자유롭지만 사랑하지 않은 채로 끝나는 것이 좋은가.

<화이트>에서 얼핏 보면 평등이라는 주제가 명쾌히 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부분에서 드러난다. 부부사이에서 욕망의 수위 차이에서 경제력의 격차에서 다시 말해 <화이트>는 평등보다는 불평등에 관한 영화이다. 폴란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평등하기를 원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실제 속담이다. 그런데 그 말은 뒤집으면 평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배치 되니까. 그래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멋진 단어이고 우린 평등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다행히도' 성취될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왜냐하면 진정한 평등이란 강제수용소에서 완성되는 것일 테니까.

프랑스에서 지금 일년 동안 살고 있는데, 그 경험이 당신의 자유개념 - 그러니까 <블루> 의 주제를 변화 시켰나.

아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도 다른 두 영화처럼 정치와는 무관 하니까. 나는 내면적인 자유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외면적인 자유 - 정치적 자유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면, 폴란드를 택했을 게다. 거기의 사정이 두더러지게 변화한 것은 아니니까. 좀 우매해 보이는 예를 들어 본다면, 당신의 여권을 가지고 당신은 미국에 갈 수 있고 프랑스의 급료를 가지고 폴란드행 비행기표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의 역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내면적인 자유는 전 인류적인 것이다.

<블루>"십계9"로 부터 한 요소(삼정병의 가수)를 그대로 옮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연장으로 보인다.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 있었고, 각각의 영화들은 당신에게 다음 영화에 대략적인 상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이다. 나는 항상 같은 영화를 찍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감독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들도 항상 같은 책을 쓰고 있다. 직업인이 아니라 작가로서.

각각의 색은 다른 나라에서 촬영되었는데, 이것은 유럽 영화산업에 대한 의무감 때문인가.

유럽 영화산업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들이 있고 그것이 전부다. <레드>를 들면 우리는 경제적인 이유로 스위스에서 촬영했다. 스위스는 작품에 돈을 댔으니까.그것 뿐만은 아니다. <레드>같은 이야기가 어디에서 일어날 법한가? 영국을 생각했고, 이탈리아를 생각했다. 그런 뒤 스위스가 완벽하다고 결정 내렸다. 단지, 중심에서 벗어나 있기를 원하는 나라라는 이유에서 그 증거는 유럽통합에 관한 국민투표이다. 스위스는 유럽 한 가운데 있는 나라지만 결국 고립으로 기울었고 그리고 <레드>는 고립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안 쓰고 영화 촬영을 할 수 있는가.

물론 어렵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는 자금을 공급받고 다른 곳에서는 그럴수 없다. 또한 내가 잘아는 다른 어떤 곳에서 작업하는 곳보다 더 재미있다. 이곳은 나의 직관을 풍부하게 해주며, 여기서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와 매우 복잡하고도 풍부한 언어를 발견하고 있다. 대사에서 하나의 작은 변화를 제안하면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20가지의 다른 화법을 가지고 내게 온다.

당신은, 세 영화를 촬영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유럽 교향악'을 창조 했군요.

당신이 헤아리는 것처럼 우리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말한다. 모두가 편안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거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당신을 유럽인으로 느끼나.

아니다. 폴란드 인이다. 더욱 특별하게는 내 집이고 내가 가끔씩 쉬러가는 폴란드 북동쪽의 작은 마을 출신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영화는 하지 않는다. 나무를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