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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상처받은 영혼의 내밀한 사랑 엿보기 [사랑에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관한 짧은 필름>


상처받은 영혼의

내밀한 사랑 엿보기



<사랑에관한 짧은 필름>은 한 존재감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에 빠져든 젊은이가 그 이미지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혼돈스러움을 겪게 되는 영화다. 19살 우체국 직원 도메크는 고아원 출신으로 외로운 성장과정을 겪었다. 한참 꿈 많고 젊음을 발산할 나이이지만 소심한 성격탓에 안으로 움추려 있는 상태 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긴밀하고 친밀한 유대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 외로움에 익숙한 청년은 단순히 직장과 집만 오고갈 뿐이다. 시리아에서 유엔국으로 있는 친구집에서 친구의 어머니와 기거하면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는 도메크,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창구는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있는 연상의 여인 마그다를 사랑하는 일이다. 연상의 여인 마그다는 고독한 생활에 깊이 젖어있는 독신녀다. 그녀에게 사랑은 육체적인 탐닉만 있을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믿고 있다. 이미 생의 의미를 채념해버린 상실성의 아우라가 진하게 배태되어있다. 그래서 그녀으 표정도 항상 메마르고 건조하다. 때로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처럼 우울하다. 도메크는 이런 풀기없는 중년여인 마그다를 절절히 사랑한다. 그리고 문란한 성생활에 감추어진 그녀의 고독을 자신의 외로움과 교감시킨다. 그렇다면 이 내성적이고 유약한 청년이 불타오르는 사랑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정답은 도메크에게 있다. 소심한 이 청년은, 아니 고아출신의 상처받은 이 가련한 영혼은 사랑을 향해 뛰어들디 않는다. 강 저편에 있는 사랑을 그저 볼 뿐이다. 마그다를 향해 다가갈 통로가 자체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도메크가 그래서 유일하게 내붐을수 잇는 사랑의 방출이 바로 엿보기이다. 불미스러우면서도 비틀린 이 행위는 그러나 도메크에게 있어서는 엄숙하기만 하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에서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고 했다. 도메크가 비록 왜곡된 엿보기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는 마그다를 훔쳐봄으로써 그녀의 아픔을 같이 느낀다. 소녀의 웃음속에 눈물이 숨겨져 있고, 냉정한 사람들의 일기장에는 정감어린 내용들이 넘쳐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내면엔 상상 하지 못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 겹겹히 쌓아놓은 치장속에 우리들의 자화상은 정작 녹슬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지... 그래서 엿보기의 행위가 비윤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밀한 순수성을 담지하고 있다. 물론 엿보기의 생리상 그 역효과가 더 크지만 적어도 이 영화 에서 도용된 엿보기의 행위는 도메크의 순수한 열망을 받쳐주는 기둥으로써 작용한다. 도메크는 일년이 넘게 그녀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면서 서서히 그녀와 동일시 한다. 상심에 사로잡힌 마그다가 울음을 토해낼 때 도메크는 가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가해함으로써 아픔을 공유하려하고 마그다가 빵을 먹을 때 도메크 도 빵을 먹는다. 여기에서 좀 적극적인 형태가 가자 통지서를 보내 그녀와 직접적인 대면을 하고, 그녀를 위하여 새벽에 어김없이 우유배달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던 어느날 또 한번의 가짜 통지서로 인해 우체국에서 큰 망신을 당하는 마그다. 모멸감에 싸인 그녀가 안스러워 그동안의 일(엿보기)을 밝히는 도메크 여기서 부터 그동안 도메크가 유지했던 거리감의 안정은 급회전을 하게 된다. 자신의 사생활이 낱낱히 발가벗겨졌음을 안 마그다는 더욱 화가나고 그날밤 도메크가 엿보기 편하게 침대를 마꿔놓고 의도적으로 남자와 정사를 벌임으로써 그의 사랑을 농락한다. 또 상대방의 남자에게 도메크가 자신들의 행위를 훔쳐 보고있다고 말함으로써 비열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제 엿보기는 곤혹스러워 졌고 도메크의 사랑방출은 갇히게 된다. 도메크는 다른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그 다음날 새벽 우유배달을 나간 도메크는 다시 한번 용기있게 구애를 하고 드디어 데이트 약속을 받게된다. 그의 사랑에 첫 신호탄이 울린 것이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식당에서 만난 도메크는 1년이 넘게 그녀의 아우라에 도취되었던

많은 시간들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마그다의 집으로 같이 동행한다. 마그다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동안 느껴왔던 사랑의 의미를 도메크에게 이야기 한다. 육체적인 행위이외에 사랑은 없다며 유혹(?)의 손길도 뻗친다. 혼돈스러움에 당황하는 도메크, 도메크가 생각했던 사랑이 가차없이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이미지는 흔들 거리고 그는 마그다의 집에서 뛰쳐 나온다. 그리고 동맥을 끊음으로써 자살을 시도한다. 도메크가 사랑했던 건 그녀에 대한 황상이었던가?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도메크는 순수하게 그녀의 이미지를 자신의 외로움에 환치시켰고 나아가서 그 상태를 영원히 꿈꾸어 왔던 것이다. 불완전한 존재를 달래기 위해 정신적인 충일함이 필요했고 그것이 플로토닉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그다에게 있어서 많은 남자들이 거쳐갔고 수없이 사랑을 나누었지만 항상 남는 것은 짙은 고독감과 허무일 뿐이었다. 그래서 도메크는 마그다를 사랑 하되 그런 남자들의 연장선에 위치하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남녀간의 사랑의 정점은 무엇일까? 물론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합일일 것이다. 여기서 마그다는 정신적인 것을 믿지 않았고 도메크는 육체적인 접촉이 정신적인 것을 손상시킨다는 강박적인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극의 스토리 전개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사랑을 통해 인간의 섬세한 감정의 파장을 그리고 있다. 깊이 패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 그 단절감을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려는 도메크의 의지는 어떻게 여운질 것인가? 잠재해 있을 그녀의 순수성이 도매크로 인해서 깨어나고 도메크도 마그다의 이미지를 서서히 체득해 나간다면.....

글 / 정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