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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박정만 시 (죽음)전문 -



영화에서, 세상에서, 은퇴한 폴란드영화의 거장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1941-96)


폴란드 영화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 감독이 13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5세. 사인은 심장마비. 만성 심장병이 동유럽 격동의 현대사를 통과 해온 자신의 삷을 스크린에 투사 시켜온 이 걸출한 감독의 인생을 거둬갔다. 심장병으로 바르샤바의 병원에 입원한 지 7개월 만이었으며, 94년 칸 영화제에서 자신의 또하나의 삶인 영화만들기로부터 은퇴를 선언한지 2년 만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세운 영화사인 토르스튜디오 제작담당자인 루자르드 스트라체프스키는 그의 12일 심장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술 하루 만에 숨졌다고 밝혔다.

연작 <십계> 시리즈에서 음악을 담당 하는 등 오랫동안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 작업을 해온 작곡가 즈비그니에프 프라이스너는 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술결과 도 낙관하고 있었으며, 10일 그와 전화통화할 때만 해도 매우 건강한 목소리 였다. 죽음을 예측 할 만한 어떤 신호도 없었다"고 전했다. 생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크쥐쉬토프는 내게 영화라는 새로운 문을 열어준 은인이며 그 덕분에 작곡가로서의 삶에도 새로이 눈뜰 수 있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토르스튜디오의 스트라체프스키 역시 "죽음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수술 전후로 건강했으며 몇주 전 스튜디오를 방문 했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직워들을 격려하기도 했었다."고 과의 인터뷰에서 맑혔다.

토르스튜디오 직원들이 이야기하는 키에슬로프스키는 독재와는 거리가 먼 온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번도 우리의 '보스'였던 적이 없다. 그 자신이 '보스'로 군림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은 또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영화가 아닌 그 어떤 활동에도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쏟은 단 한 가지는 바로 영화만들기였다."

폴란드 영화의 선배 감독인 크쥐쉬토프 자누시는 "우리의 자랑거리이자 따뜻한 친구였던 그가 이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위대한 감독이었으며 도덕적, 윤리적 권위 그 자체였다. 오늘날과 같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특히나 더 그리운 인물인 것이다."

그는 작품주제와 제작방식을 통해, 분열과 통합시대 유럽영화의 한 전범을 수립한 인물이다.

새로운 삼부작의 구상도 그와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난 3년 사이 그의 대표작인 세 가지 색 연작과 87년작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등이 집중적으로 수입 개봉 하면서 국내 관객과 낯을 익힌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그 작품 주제와 제작방식을 통해, 분열과 통합시대 유럽영화의 한 전범을 수립한 인물이다. 폴란드의 우울한 정치 상황과 그 속에서 예술과의 딜레마를 그린 <어느 당원의 이력서>등 폴란드 사회를 영화로 찍어내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서방 세계의 시선을 쏘이계된 계기는 TV용 연작영화 <십계>였다. 시리즈 중간부터 베를린 방송국이 공동 제작자로 참가 했으며 말년의 세가지 색 시리즈는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자본으로 공동제작됐다.

그는 94년 칸에서 유력한 그랑프리 후보였던 세 가지색의 마지막 편 <레드>가 '미국서 온 젊은 녀석' 쿠엔티란티노의 <펄프픽션>에 밀렸던 바로 그 직전 감독 은퇴선언을 했다. "더이상 영화를 만들 힘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몹시 지쳤다"는 것이 은퇴의 변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이 중해진 작년에도 천국, 지옥, 연옥을 소재로 한 삼부작 구상을 언급하는 등 왕성한 예술혼을 잠재우지 못했다. 결국 그는 이 마지막 삼부작을 시작하지 못한 채, 작품 속에서 만나보려 했던 사후 세계로 직접 떠나가 버렸다.

오은하 기자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멋진 단어다"

키에슬로프스키 어록

카메라 "나는 일개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카메라라는 창을 통하여 밖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다. 벽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교차로를 지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어할 뿐이다.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 그것은 대단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진으로 찍거나,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곳을 향하여 다가가려 시도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돼 있을 뿐이다."

포커스 "내 영화는 현상적인 것 너머의 무엇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렵다. 내가 잡고자 하는것? 아마도, 영혼일 게다. 어떤 경우에서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진실 혹은 도망치면서 잡히지 않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영감 "나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오직 배우를 찾기위해 극장에 간다. 내 영화에 영감을 준 것은 문학과 삶이다. 내가 스승으로 여기는 감독은 없다. 내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건 문학이다. 여기서 문학이란 그리스 비극부터 철학서적과 소설을 다 포괄하는 말이다. 그리고 문학보다 더 감동적인 건 삶이고 인간이다."

지식 "장인의 지식은 그의 기술의 한계안에 머문다. 예를들면, 나는 렌즈에 관하여 그리고 편집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다. 카메라의 각기다른 버튼의 용도와 마이크 사용법도 조금 안다. 난 모든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진정한 지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사는지...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다."

이상 "자유, 평등, 박애, 수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이상을위해 죽어간다. 우리는 그 세가지 이상을 골똘히 탐색했고, 그것이 일상속에서 어떵게 기능하는지를 살펴 보았다. 개개인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우리는 이 이념들이 인간본성과는 모순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당신은 그 이념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 갈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 평등, 형재애를 느낄까? 그저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우리는 항상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 서있다."

공산주의 "폴란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누구 보다도 더 많이 평등하기를 원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그말은 뒤집으면 평등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그것은 인간본성에 배치되니까. 그래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멋진 단어이고 우린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다행히도' 성취될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왜냐하면 진정한 평등이란 강제수용소에서 완성되는 것일 테니까."

검열 정치검열은 심각하고 위협적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검열제도가 영화감독에게 아주 재미있는 결과를 갖다 주기도 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특별하고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영화언어를 쓰게 되기 때문이다."

고향 "나는 유럽인이 아니다. 폴란드 인이다. 더욱 특별하게는, 내 집이 있고, 내가 가끔 쉬러 가는 폴란드의 북동쪽의 작은 마을 출신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영화는 하지 않는다. 나무를 벤다."

만남 "삶은 우연한 만남들로 가득차 있다. 매일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숱한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 순간, 이 카페에서, 낯선 사람들 곁에 앉아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일어나서 떠나고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영한 만남은 오히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보다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살잉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는 미래의 살인자와 변호사가 서로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삼부작에서 그들은 한 작품과 다른 작품의 관련점을 찾기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의 기쁨을 위해 만난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게임과 같다."

영화산업 "영화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나라는 한손에 꼽을 정도다. 이것은 땅덩이 인구수와 관련있다. 전 세계에서 미국, 인도, 중국, 러시아 이 네나라만이 자기네 언어로 만든 영화로 돈 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 가능성을 이용했고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제 과거와 같은 좋은 영화가 없다. 채플린이나 히치콕은 이미 사라졌고 스콜세지, 코플라, 알란 파커는 남아 있지만 그들이 지금 만드는 영화는 예전과 틀리다."

영화1백년 "생일에는 무언가 축하를 해야 하겠지만 지금 영화는 대단히 나쁜 타이밍에 생일을 맞은 셈이다. 말하자면 행복으로 가득차 있던 결혼생활을 끝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고 할까? 색체와 음성을 획득하는 기술 혁신과 함께 영화는 언제나 젊은 에너지로 기대외어 왔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무언가 새로운 변화는 바랄수도 없다. 푹 가라 앉아서 새로운 표현을 할 기운 같은 것이 없다. 영화관객들도 상업주의에 젖어 비극의 끝을 달리고 있다. 발밑이 무너지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자영화 "전자 미디어와 일하는 것은 내겐 불가능 하다. 필름이 없어지면 나는 죽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 겠지만 그런 시기가 올 것을 예감하고 있다."

은퇴 "영화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깨달았다. 처음엔 의식이 그 다음엔 심장과 건강이 은퇴할 이유를 증명 했다. 그만두길 잘한것 같다. 그때 그만두지 않았으면 훨씬 나빠졌을 거다. 피곤해서 그만 두는게 아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늘 피곤하고 나도 그저 그 정도로 피곤했다. 솔직히 나는 영화 만들기에 넌더리가 났다. 영화가 더이상 열정의 대상 이거나 마음 졸이는 일이 아니었다. 영화 만드는 작업을 몇 십년 동안 했고 나 스스로 그 방에서 나가고 � 싶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쫓아내는 것보다 스스로 나가고 싶어 나가는 게 한결 나은 일 아닌가."




회의와 절망

그리고 희망과 의지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세계





어딜가나 영화 포스터 한 두점은 걸려 있는 요즘, 가장 흔하게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뤽 베송의 <그랑 블루>와 함께 단연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블루>다. 줄리에트 비노쉬의 처연한 얼굴이 푸른 배경 속으로 잠겨드는 듯한 강렬한 이미지의 포스터, 실제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마치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를 읽는 것처럼 망막 저편으로 삽시간에 맺혀든다.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세 가지 새 연작 <블루> <화이트> <레드>로 우리에게 알려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의 영화들은 일종의 게임처럼 하나의 개념을 놓고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힌 그물망을 통과 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철학적 질문으로 둘러싸인 일상을 재구성 하여 사유의 복도를 통과하게 만든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 하나가 끼워 졌을 때 비로서 전체 윤곽이 드러나듯, 구부러진 목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가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감독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다보면 흔적을 통하여 직감으로 공명하고 느낄 뿐이다.

그는 관객들이 이해를 넘어서 우연적인 동시성으로 규정되는 동질감을 느끼기를 원한다. 세 가지 색 연작의 첫작품 <블루>가 온통 빛과 소리로 가득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빛과 소리는 사유 이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의 형태다. 항상 키에슬로프스키와 함께 작업한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우울하면서도 힘찬 음악이 때로 영상을 대신하기도 하면서 <블루>의 형식미는 극한에 다다른다.

그런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 다운 작품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이렌느 야곱이 1인 2역) 아무런 혈연적 관계도 친분도 없는 두 사람에게 존재하는 동시성(synchronicity). 키에슬로프스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사소한 일상의 끄트머리 들이다. 그들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은 오로지 직감과 초자연적인 지각에 의하여 가능하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의 관계는 '이해한다'라는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합리성과 논리 이전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 마치 공명상자처럼.

마찬가지로 이렌느 야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드>에서는 그 동시성, 우연과 재귀의 고리로 드러난다. 반복적인 나선형의 구조가 중첩되고 한 사람의 운명이 타인네 얹혀지는 불가해성의 세계 한없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에서 우연히 한 가닥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 처럼 키에슬로프스키는 하나씩의 교훈으로 비합리적 이성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그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가장 '유럽'적인 통합 유럽의 이상에 걸맞은 문학적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감독이었다. 방대한 유럽의 인문학적 토양 위에서 역사의 모든것을 경험한 실험적인 작가, 근대의 합리적 사고와 논리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의 현실모순을 경험하고 비합리적 이성의 직관에 도달한 탈 현대적인 거장.

키에슬로프스키는 동과 서로 갈라져 있던 유럽에서 영화적으로 양자를 통합한 지성적인 감독이다. 동구영화는 이제 '동구영화'라는 호칭이 아니라 '유럽영화'의 일원으서 자리를 잡게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이상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포함한 세계의 근원을 향한 철학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탈현대적 사유, 비합리적이고 동양적인 세계관을 가장 유려하게 영상으로 만들어낸 키에슬로프스키는 '통합유럽' 이라는 용광로의 불씨가 된 것이다.

아직 4년 남았음에도, 그의 죽음으로, 20세기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그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극에 달했던 20세기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비합리적 이성의 언덕을 넘보았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이력은 다큐멘타이레서 시작 하였다. 사물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형식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과 계몽주의의 종범인 마르크시즘의 몰락을 몸소 지켜본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십계>를 만들던 88년은 이미 모든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동구의 몰락과 역사의 종말, 키에슬로프스키는 아주 비관적 어조로 십계를 재해석 한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TV판 결말은 비극이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참혹한 세상에 물론 영화판의 결말은 익히 아는 대로 열려진 해피엔딩이다. 이 상반된 결말을 어떻게 보아야만 할까. 가치관의 변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제도 나아가 사회의 모든 제도에 대한 회의를 암시하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설명되지 않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시적 은유이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세 가지 색 연작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 회의와 절망 그리고 희망과 의지까지 모두 담아낸다.

<블루>와 <화이트>를 거쳐 <레드>에 다다른 키에슬로프스키는 결말에서 배를 침몰시키고 주인공들 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여 버린다. 이를테면 1천 5백명이 죽고 자유, 평등, 박애 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재귀 다시 돌아온 혁명의 시기에 택해야 할 운명이다. 연작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반복적으로 되풀이 한다.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희생 해야만 하고 박애는 그 모든것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대혁명의 이념은 제대로 실현 된 적이 없고 인간의 본성은 자유, 평등, 박애와 배치되는 선상에 놓여있다.

<레드>에서 천사처럼 아상화된 발렌틴(이렌느 야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로를 배신하고, 떠나고, 신뢰하지 않는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코 인간이 선하다고 믿지 않는다. 마르크시즘의 시작이 만인의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자유라는 당위에서 출발 했지만 어느것 하나 달성하지 못하고 좌초해 버린 역사적 사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반복되는 나선형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조금씩 배우고 전진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자유의지가 성취할 수 있는 궁극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가 <레드>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찍지 않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일이다. 가장 사적인 발언이라고 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보여지듯, 그는 어느 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영역인 것이다. 공적인 발언은 대혁명의 이념을 재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키에슬로프스키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들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10여년간 집중 되었고, 그는 과거가 아닌 현재, 당대의 거장 이었다. 그래서 아직 4년이 남았음에도 20세기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합리성이 모든것을 장악했던 현대, 인간이 모든것을 이해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는 순진한 오만과 자기과시가 극에 달했던 20세기, 그곳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비합리적 이성의 언덕을 넘보았던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언제나 경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에밀 쿠스트리차와 같은 진영에 속해있다. 추악한 현실을 가장 잘 알고 그려내면서도 비합리적 이성에 호소하고 빨려드는것. 쿠스트리차가 민족적 경험에 근거한 초현실주의자 뮤즈에게 사로잠힌 시인이라면 키에슬로프스키는 회의에서 출발한 현실적인 신비주의자, 구루에 경도된 철학자 이다. 지금 키에슬로프스키는 영원의 대지로 떠나고 쿠스트리차는 영화를 손에서 놓았다. 이제 21세기의 영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김봉석/자유기고가



작품 연보


    극영화

    1975 <어느 당원의 이력서>(Personel)

    1976 <상처>(Blizna), <고요한>(Spokoj)

    1979 <아마추어>(Amator)

    1981 <맹목적인 기회>(Przypadek), <짧은 작업일>(Krotki dzien pracy)

    1984 <십계>(Dekalog) 모세의 율법 '십계'를 현대 폴란드로 새롭게 풀었다. 율법이

	 가르치는 도덕과 윤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모습일까. 착상과 애기 전개가 예측불허인

	 10편의 소품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Krotki film o zabijaniu)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Krotki film o milosci) <십계>연작 중 극장용으로 재편집한

	 영화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말라' 두편, 후자가 바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란 제목으로 공개됐다. 엿보기 심리를 사랑으로 끌어올리는 불가사의한 편집의 힘.

	 1991 <베로니카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이 신비로운 화두에 동구와 서구의 풍경이 겹처지는 매혹적인 작품.

	 1993 <세가지 객: 블루>(Three Colors:Blue, White, Red) 블루는 프랑스 삼색기 중 자유

	 를 상징하는 색. 영화 전편이 청색으로 덮힌다. 여주인공의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 사

	 랑과 자유의 이율 배반적인 관계를 따라간다.

	 <세가지 색: 화이트> 화이트는 평등을 상징, 프랑스 애인과 헤어진 폴란드 청년이 경제적

	 평등없인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돈을 모은다. 그러나 그다음엔 사

	 랑이 오는가.

	 1994 <세가지 색: 레드> <세가지 색> 시리즈의 완결판, 화두는 박애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

	 는 이상과 개인의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

    단편영화, 기록영화

    1996<궤도전차>(Tramwaj), <우체국>(Urzad)/ 67 <초청 연주회>(Koncert zyczen)/ 68

    <사진>(Zdjecie)/ 69 <로쯔라는 도시로부터>(Z miasta Lodzi)/ 770 <나는 군인이었다>

    (Bylem zolnierzem), <공장>(Fabryka)/ 71 <집회직전>(Prezed Rajdem)/ 72 <후렴구>

    (Refren), <바로끄로우와 지에로나 고라 사이>(Miedzy Wroclaawiem a Zielona Gora)

    <쿠퍼 광산에서 안전과 위생에 관한 규율>(Podstawy BHP w kopalni miedzi), <노동자

    '71: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Robotnicy '71: Nic o nas bez nas)/

    73 <벽돌공>(Muraz), <지하보도>(Przejsciepodjiemne)/ 74 (Przeswietlenie),

    <첫사랑>(Pierwsza milosc)/ 75 <커리큘럼>(Zyciorys)/ 76 <병원>(Szpital), <슬레이트>

    (Klaps)/ 77 <야경꾼의 시점에서>(Z punktu widzenia nocnego portiera), <난 몰라요>

    (Nie wiem)/ 78 <다양한 나이의 일곱 여성>(Siedem kobiet w roznym wieku)/ 80 <기

    차역>(Dworzec), <토킹 헤즈>(Gadajace glowy)/ 88 <일주일>(Sidem dni wtrgodni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