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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책

밖의 삶 [아니 에르노]

![](https://contents.kyobobook.co.kr/sih/fit-in/458x0/pdt/9788932923567.jpg)

 

여론 조사와 그 결과를 소개하는 방식은 인종주의를 교묘하게 정당화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의견에 불과한 것이 진실이 된다.

아이는 얌전히 있게 단속하기 어려운 서너 살 짜리다. 대학생들은 점점 넌더리가 나는 모양이다. 바로 그 특정 순간에 문화 차이, 관용에 대해 그들이 읽고 배웠던 모든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쩌면 철학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이념 세계의 우월함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에게는 독서를 방해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더 공고히 해줄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허구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용납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처럼 후회의 부인을 통해 범죄를 정당화함으로써 글쓰기가 범죄를 더 악화하지 않는가? 다비드 본의 그 글귀를 본 이상, 선 택해야 한다. 글쓰기는 윤리 밖에 위치한다. 혹은 글쓰기는 계속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다른 쪽 사람들이 한쪽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발견한다면, 한쪽의 죽음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소리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보여 주지만 주주들은 보여 준 적이 없는데, 그들은 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요는 삶을 소설로 바꿔 준다. 노래는 우리가 겪었던 것들을 아름답고 아련하게 만들어 준다. 훗 날 그 노래들이 들려올 때 느껴지는 아픔은 바로 그러한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