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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책

오늘도 돌아갑니다, 풍진동 LP 가게 [임진평 , 고희은]

![](https://contents.kyobobook.co.kr/sih/fit-in/458x0/pdt/9791130657820.jpg)

 

다림은 더없이 조심스레 정원이 건넨 만년필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보았다. ‘정안이 정원에게’라고 적힌 각인을. 정안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을 거다.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가니까. 좋은 기억 때문에 사는 사람도 있고 나쁜 기억 때문에 사는 이도 있다. 다림은 사실 후자에 더 가까웠다.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그 기억을 보상받기 위해 기를 쓰고 살아야겠다고 매번 다짐해 왔다.

며칠 전 정원은 정안을 꿈에서 만났다. 꿈속에서도 그게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슬펐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깨면 정안은 사라질 테니까.

어떤 사람들은 종종 별 의미 없는 일에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불편 정도는 감수하는 법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애초에 나를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일이었다.

“응. 하지만 그 좋은 사람들은 항상 나쁜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지.”

“아까 얘기한 「아들의 방」이란 영화 포스터에 그런 구절이 있었어요. ‘그래, 너는 어쩌다 마법의 동굴에서 잠깐 길을 잃은 거야. 인생을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라는. 그런데 솔직히 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인생을 결정하는 게 우리가 아닌 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어떤 위로가 되는 건지요.”

“미안해, 형.” 어떤 이들은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때 미안하다고 말한다. 정안은 그렇게 떠났다.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서.

언젠가 정안이 그랬다. 로봇에게는 마음이 없어도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으니 고장 난 로봇을 향해 얼마든지 슬퍼하고 연민해도 된다고. 그게 인간이라고. 정원은 정안의 말을 마음에 또 새겼다.

“로봇에게는 마음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람한테는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