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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모르겠으면 하면 되는 건가?" "나는 모르겠으면 그냥 하거든. 아까 인사한 선생님인 것 같은데 또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으면 그냥 해. 자 기 전에 양치를 했나 안 했나 헷갈릴 때도 그냥 하고." "그럼 나도 그냥 해야겠네."
p66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 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 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p87
금성무는 그렇게 설득했고 세탁소 사장도 "지금은 겨 울옷을 싹 정리해서 넣을 때지. 입을 때는 아니야" 하고 도왔다.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 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 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p103
리사는 대답하지 않고 춘당지를 바라보며 섰다. 그새 춘당지에는 저녁 윤슬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환한 풍경과 달리 대화는 밤처럼 어둡다고 생각했다. 이 따금 원앙들이 일으키는 잔물결 위로 나무와 진달래와 오 래된 석탑이 드리워지면서 마치 연못 속에는 그것과 동일 한 세계가 하나 더 있는 듯한 아득한 착각까지 드는데, 서 로를 할퀴어대는 얘기에나 열을 올려야 한다니. 순간 그 눈부신 풍경이 불필요하고 심지어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p113
"때로는 믿어야 살 수 있어서 누군가를 믿게 된다고, 정 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막상 리사가 진지하게 물어오니까 나는 답을 못하고 한동안 복숭아만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아니면 사람이 대체 어떻 게 살지?" 내가 답하자 리사는 복숭아씨를 벤치 아래로 뱉고는 땅속으로 밟아 밀어넣었다. 그리고 창경궁은 밤에 봐야 정말 사람이 살았던 곳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말 사 람이 사는 집처럼 적당히 비밀스러워진다고.
p122
"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말자. 내가 산아에게 말했다. "너무 마음이 아프면 외면하고 싶어지거든. 아까 우리 도 말했지? 너무를 조심하자고."
p156 -156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 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 하고 외쳤다. 순 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 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 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 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 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 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 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 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 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p179
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 은 아이도 없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자신의 것 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자기를 둘러싼 어른들 이 세파에 휩쓸려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 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 까. 나는 아마 산아도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지 않 았을까 짐작했다.
p180
"사람들은 어쩐지 자주 보는 건 결국 싫어해. 마음이 닳 아버리나봐." "건전지예요? 닳게?" " 많이 쓰면 닿지, 닳아서 아예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걸."
p269
통발을 거두다 엄마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아빠 는 계속 선장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육지에서 일을 찾 아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바다에서 일 할 수가 없었고 그럴 수 없었던 아빠를 나는 어려서도 이 해했다. 이해했기에 밉지 않았다. 이해하면 미움만은 피 할 수 있었다. 때론 슬픔도 농담으로 슬쩍 퉁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산아와 나는 곧 별자리들을 찾았고 거기에 우 리가 아는 이름들을 하나씩 붙여보았다.
p318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 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p403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 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할머니는 딩 아주머니네를 다녀오던 어느 날처럼 나를 말간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 음을 돌릴 수 있다는 듯이. 그때는 할머니의 진심을 받아 들이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어딘가 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스미와 산 아가 서로 손을 흔들며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나는 완성이라고 여겼던 보고서를 다시 이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산아와 함께 원서동을 천천히 걸어 낙원하 숙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