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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책

아찰란 피크닉 [오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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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네 이야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그런 거 있잖아. 네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거면 뭐든지. 그런 대화를 너무 오래 안 한 것 같아.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 그런 이야기 해?"

p200

새는 어떻게 허공을 향해 뛰어들 수 있는 걸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사방에서 뭔 가가 나를 팽팽하게 짓누르며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그 게 뭐였는지 알아? 바로 허공이었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 공. 내 주위에는 언제나 허공이 있었던 거야. 내가 일하던 텅 빈 건물에, 내가 달리던 텅 빈 거리에, 내 머리 위에, 내 발밑 에도. 나는 그걸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어. 그것과 마주치면 눈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거기에 빨려들 것 같아서. 그 러다 허공에 끌려가게 될 것 같아서. 나중에 보니까 허공은 엄마와 나 사이에도, 출발선과 결승 선 사이에도 있더라.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도. 그게 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말 몇 마디 한다고 원 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 생각에는 아무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아. 이런 말을 해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희망이 없는 것도, 우리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도, 네가 언젠가 이곳을 떠날 거라 는 것도, 나는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 거라는 것도. 그런데도 너는 말했어. 내게도 좋은 일이 있어도 되지 않 냐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오늘 아침 출발선에 섰을 때를 떠올 렸어. 그때 나는 너를 떠올렸어. 그리고 동생의 숨소리와 치킨 누들의 맛을. 공통점이 뭔지 알아? 모두 내가 좋아하는,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이라는 거야. 나는 왜 너를 생각했을까. 이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게 별 로 없는데. 뭔가를 함께 하기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깊은 계곡에 던져지 는 돌멩이처럼 허공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텐데. 나는 네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까.

p256

"누가 그렇게 정했는데?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사람이야. 사람이 굳이 아찰처럼 살 거 없잖아. 사람 인 동안에는 말야."

p326

아란은 아찰을 보며 파보를 떠올렸다. 파보가 아직도 피 란 목도리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혹시 파란 목도 리를 한 아찰은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기도 했 다. 파보는 아찰이 될 때까지 계속 염색 공장에서 일했다. 그 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란을 학교에 보내고 공부를 가르쳤 다. 그의 삶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보의 인생은 결국 뭐였던 걸까.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가 결국 아찰이 되 고 마는 삶이라니. 그리고 지금은 엄마가 그런 삶을 살고 있 다. 엄마는 내게 자기처럼은 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어떻게 살라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도 모르니까.

p360

아란은 요제가 전에도 같은 말을 했었던 게 기억났다. 문득 그림책을 그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생각을 한 번 도 해 보지 않았을까. 세상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지. 헤임에 가야 한다고. 높은 종평을 받아야 한다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 고. 안 그러면 굴러떨어져 결국 아찰이 되고 말 거라고. 여기까지 올라오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넓고 헤임은, 아 니 아찰라는 아주 작은 곳이라는 걸. 황야는 아득하게 넓고 지평선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곳에 있었다. 아란은 대지 끝 에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문득 아주 먼 곳에서 불빛이 반짝인 것 같았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인지도 몰랐다. 아란은 불빛이 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봤다. 그리고 눈을 오래 감았다가 떴다. 세상으로 내려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