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 영화평론가 |
키에슬로프스키가 <십계>연작 중 여섯 번째 작품을 극장용으로 재편집하면서 <사랑에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다큐멘터리이며 단펀영화이다. 여기에서 다큐멘터리라면 오직 인간 정신의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이며, 단편영화라면 "장편영화는 누구나 찍을수 있지만 단편영화는 진정한 예술가만이 찍을수 있다"라고 했을 때 바로 그것을 뜻한다. <십계> 연작을 '인간 내면에대한 열편의 다큐멘터리적 단편영화'라고 규정지을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음주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영상문화읽기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바로 보면 사랑이 보인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최고 걸작
그가 <레드>를 마지막으로 극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 사건은, 영화계를 쇼비즈니스계와 동일시 하는 사람들의 구구한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는 진실이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좀처럼 자신의 원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설명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그저 보면 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의 본질에 육박 하고자 하는데, 그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바로 '본다는 것'의 본질을 견지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떻게 토맥이 본다는 행위만을 통해 연상의 마그다를 사랑하게까지 되는가. 어떻게 훔쳐보기가 어느숨간 진정한 사랑의 시선으로 비약하는가. 이 영화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본다는 것, 보는 눈길, 곧 시선의 유지라는 것이 고도의 대뇌활동을 필요로하는 적극적 행위임을 알아차리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을 것이다.
열아홉살난 토맥은 훔쳐보기를 통해 그의 첫사랑을 시작한다. 본다는 것을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만남으로 정의한다면 훔쳐보기에서는 그 시선의 주체가 뒤로 숨어버린다. 그것은 욕망을 투사하기위한 것이거나 대상을 은밀히 감사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래서 한쪽은 관음주의로 흐르고 다른 한쪽은 지배의 수단이 된다. 어느 쪽이건 병적이다. 그런데 토맥은 어떻게 그러한 훔쳐보기를 통해 마그다를 사랑하는가. 그 비밀의 문은 토맥의 훔쳐보기가 거의 다른 욕구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열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당신이 어떤 다른 욕구를 품고 누군가를 훔쳐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지속되었던가를 밭추해 보라.
말하자면 토맥은 본다는 행위의 본질 자체에 점차 충실하게된다. 그에게 망원경은 마그다를 성적으로 훔쳐보기 위한 관음의 창에서 차츰 그녀와의 거리를 줄이는 도구로 그 용도가 옮아간다. 그러나 그 도구는 마그다의 탁자에 우유가 엎질러지는 장면에서 무력하기 짝이없다. 이 지점에서 토맥의 훔쳐보기가 결정적 사랑의 열정으로 전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줄곳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는 더 중요한 비밀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요컨데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토맥의 입장이 아니라 늘 보여주기만 하는 마그다의 입장에서 서야만 풀 수 있다고 덧붙인다.
보여지는 자의 입장에 서라
여기서 그는 참으로 곤란한 요구를 하고 있다. 화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 자체는 사실 바로보기의 실마리일 뿐이지 아무른 뜻도 없다. 그것이 곤란한 까닭은 관객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육체를 즐기지만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螡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그다가 지금까지 그녀를 훔쳐 보아온 관객 자신의 초상에 다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는 토맥의 자리에서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보는 마그다에게 찾아온 사랑의 순간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장면에서 토맥과 마그다의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은 조화를 이룰수 있는가 따위의 어려운 문제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그녀가 토맥의 창에서 자신의 창을 발 봤을 때 '마그다라는 이름의 나'에게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에 놀라운 공감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근본적으로 단편영화작가이자 다큐멘터리작가인 키에슬로프스키의 최고 걸작에 틀림없다.